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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4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백화종 편집인이 쓴 '고건표(標) 작품을 보고싶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기자가 옛 민정당에 출입하던 20년쯤 전의 얘기다. 우연히 고건 의원과 자리를 같이했다. 장난기가 발동한 기자가 그에게 “기자들이 부르는 고 의원의 별명이 뭔지 아십니까”고 물었다. 뭐냐고 그가 되물었다. “놀프”라고 대답했더니 놀프가 뭐냐고 다시 반문했다. “노 헬프의 준말, 즉 취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해줬다. 같이 웃었다.
그랬다. 고 전 총리는 ‘미제 지퍼’라는 또 다른 별명이 말해주듯 취재원으로선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시대 엘리트 관료로서 몸에 밴 습성이리라. 고위 공직자로서 갖춰야 할 요건이자 인사권자에겐 덕목 중의 하나로 꼽혔을 테고.
좀체 속내를 보이지 않는,그리고 돌다리도 몇 번씩 두드려본 뒤 건널까 말까 또 고민하는 그의 신중한 행보가 계속되고 있다. 자신이 공동 대표로 있는 ‘희망한국국민연대’를 모두 대선에 대비한 그의 전위조직쯤으로 보고 있으나 그는 정치 개혁을 위한 시민 조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원래 그런 성격이니, 본인이 시인하든 말든 ‘희망연대’ 출범과 함께 고 전 총리의 대선 행보도 본격화됐다고 봐 무리가 아니다.
정치인보다는 행정의 달인이라는 칭호가 더 잘 어울리는 그를 정치의 정점인 대통령 후보군 반열에 올려놓은 건 역시 노무현 대통령이다. 물론 도지사와 국회의원, 세 차례의 장관, 두 차례씩의 서울시장과 국무총리, 그리고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누구도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경력도 그를 유력한 ‘차기 주자’로 만드는 데 밑거름이 됐다. 그러나 그 화려한 경력을 밑거름으로 하여 그를 대선 후보로 꽃 피게 한 건 노 대통령 스스로도 토로한 ‘지난 3년 반의 시끄러웠던 국정운영’인 것이다.
노 대통령은 처음 총리를 기용하면서 자신을 불안하게 구를 우려가 있는 몽돌(물에 닳아서 둥글둥글해진 돌을 이르는 경상도 말)에, 고 전 총리를 그런 자신을 안정되게 붙잡아줄 받침대에 비유했었다. 그는 실제로 재임 중, 특히 노 대통령 탄핵심판이 진행되는 동안 능력과 경륜을 유감없이 발휘, 국정의 공백을 메웠다.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그의 안정적 국정운영은 노 대통령의 혼란스러움과 대비되면서 점수를 많이 땄다. 이로써 많은 사람들이 고 전 총리 정도의 모범생이라면 대통령이 되더라도 큰 사고는 치지 않을 것이며 지금과 같은 정치적 혼란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음직하다.
조용한 날이 없는 지금의 분위기로서는 이 정도면 대통령 후보로서 최소한의 필요조건은 갖추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듯 국민은 그가 총리라면 그 정도로 만족할지 모르겠으되 대통령이라면 그에 대한 기대도 커질 게 틀림없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은 최근 (민주화 세력이 집권한) 지난 10년은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 잃어버린 세월이었다고 자탄했다. 국민은 그 잃어버린 10년으로 잔뜩 허기져 있다. 국민은 그 허기를 채워줄 지도자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다. 안정적 국정운영이 대통령이 되는 데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못되는 이유다.
다른 사람도 크게 다를 바 없지만 특히 고 전 총리는 대통령이 되겠다면 이미 검증받은 안정적 국정운영 능력에 국민의 허기를 채워줄 +α,즉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 그에게선 모범생으로 신중하고 안정적이며 그래서 무난하다는 것과 찬물에 손 담가가며 밥을 짓고 설거지하기보다는 차려놓은 밥상을 관리하는 데 능숙하다는 이미지 외에 보다 적극적인 그것이 얼른 떠오르질 않는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고건만의 고유 브랜드 작품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최고 지도자를 지향하는 사람으로서 신중하고 능력 있는 관리자의 이미지만으론 국민의 허기와 기대를 채워줄 수 없다. 개척자 정신으로 선봉에 서서 독자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가다가 상처를 입고 넘어지더라도 이를 쟁취하겠다는 도전적인 모습이 필요하다. 독창적이며 힘 있고 용기 있는 자만이 최고 지도자가 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