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28일자 오피니언면 '포럼'란에 박효종 서울대 교수가 쓴 <역사에 ‘코드’ 남기려는 노정권의 독선>입니자.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노무현 정부에는 역대의 정권들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집착이 있다. 자신의 족적을 역사에 남기는 일을 넘어서서 자신의 업적이 신기원을 이루는 위대한 업적으로 기억되고 차기정권들에서도 지속되기를 바라는 열망이 매우 강렬하다는 점이다. 임기 1년반을 남기고 갖은 비난을 무릅쓰고 측근 인사들의 요직 배치를 강행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인걸’은 가고 ‘산천’은 변해도 ‘코드’만은 남았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기 때문이다.

    중과세 위주로 부동산 정책을 입안하고 밀어붙일 때도 자신의 부동산 정책만큼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지 말고 ‘헌법’처럼 불변의 법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앞으로 15년간 복지 지출을 미국이나 일본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는 내용의 미래 청사진이 담긴 ‘비전 2030’을 내놓았는데, 여기서도 다음 정권들에 구속력을 가진 비전으로 남았으면 하는 염원이 드러난다.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는 물론, 용산민족공원도 마찬가지다. 광복 100주년이 되는 2045년에 완공을 목표로 한 용산기지공원화 선포식을 열었을 때 ‘자주국방’과 ‘자주한국’의 기치를 내건 자신의 비전이 영원토록 계승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간절함이 읽힌다.

    이처럼 자신의 정권으로부터 미래 한국의 신기원을 만들어내고 싶다는 생각은 이미 단순한 행정수도 이전을 ‘천도(遷都)’라는 거창한 구호로 접근한 데서 알아봤다. 국가와 사회의 중추세력을 교체해 보겠다는 원대한 꿈이 있었던 것이다. 새로 나온 5000원권도 그러한 꿈의 일환일까.

    정권은 5년 단임인데, 20∼30년을 내다보는 야심찬 꿈과 계획을 내놓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정말 노 정권은 ‘영원한 제국’을 꿈꾸고 있는가. 아니면 ‘새로운 제국’을 만든 역대의 시조들처럼, ‘불사(不死)정권’을 만들거나 ‘정치적 불멸성’을 획득하고 싶은 것인가. 하지만 5년 단임에는 ‘영원한 제국’이나 ‘불사정권’이 있을 수 없고 다만 ‘시행착오 정권’만이 있을 뿐이다. 참여정부 아래서 나타난 수많은 정책 실패들을 보면 이 점이 명백해진다. 이런 정책실패들은 다음 정권에서는 고쳐져야 하는 것일 뿐, 계승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기원과 위대한 시작이 자신으로부터 이뤄지기를 바라는 것은 과욕이다. 달리기로 말한다면, 각 정권은 배턴터치의 ‘이어달리기’를 하는 것이지 단독마라톤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전 것들은 모두 ‘수구’와 ‘기회주의’라고 비난하면서 ‘단절’과 ‘청산’을 말해왔는데, 유독 자신의 비전과 자신의 ‘코드’, 자신의 철학만은 영원하리라고 믿는 것인가. 다른 정권들은 모래성을 쌓고 자신만 만리장성을 쌓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기중심주의에 함몰된 ‘나르시시즘’의 소산일 뿐이다.

    노 정권에 충고하고 싶은 것은 10년이니 20년이니 하는 머나먼 미래를 설계하거나 로드맵을 짜는 노고를 들이기보다는 ‘지금’과 ‘여기에’ 충실하라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충실하라는 것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던진 화두이기도 하다. 이 화두를 경청한다면, 하늘의 별만 바라보다 눈앞의 구덩이에 빠진 천문학자의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말고 현실을 치열하게 고민하는 ‘실존주의 정권’이 돼야 한다. 미래도 좋고 비전도 좋고 역사도 좋다. 또 임기말을 1년반 앞두고 황혼 녘의 태양처럼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고 싶다는 의욕을 가졌다한들, 이를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노 정권은 역사에 남을 만한 거창한 일을 하겠다는 마음보다는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돌 하나를 놓겠다는 소박한 마음이 중요하다. 큰 욕심을 내기보다 조그마한 일에 충실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