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9일자 오피니언면 '중앙시평'란에 칼럼니스트 변상근씨가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노무현 정부의 대미외교 행보가 갈수록 꼬이고 있다. 이백만 청와대 홍보수석은 청와대 홈페이지의 한 글에서 "참여정부는 대미관계를 '친미자주'로 설정해 놓고 있으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친미자주'의 경제적 결정판"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미국에 대해 '자주'하면 반미자주로 몰아치지만 '친미자주'도 있다는 항변이다. 자주면 자주지 '친미자주'는 뭔가. '반미 좀 하면 어때' '한국 각료는 미국이 실패했다고 말하면 안 되는가'하고 내놓고 할 말을 하는 일을 말하는가. 미국에 어쩔 수 없이 주어야 할 때 순순히 주지 말고 최종 순간까지 애를 먹이면서 주는 것을 말하는가.

    정상 독립국가치고 자주외교를 겉으로 꽹과리 치는 나라는 없다. 노 정부의 자주는 외교와 국방에서 미국에 '맞장 뜨는' 일이고 그 성격상 '친미'적이기는 어렵다. 동맹의 균열 우려가 공공연히 나오고 '체면 때문에 이혼 못하는 관계'로까지 묘사되는 마당에 '친미자주'를 미국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한.미 FTA가 친미자주의 결정판이라는 성격 규정 역시 무리다. 미국과의 FTA 체결은 친미와 반미 차원이 아니고 서로의 필요에 의한 동시다발성 국익게임이다. 미국은 한국만이 아니고 말레이시아.태국.파나마 등과도 FTA를 추진 중이고, 한국 역시 20개국과 추가로 추진할 계획이다. 두 나라 단위의 FTA가 서로 얽히고 설키면서 전 세계의 무역자유화로 가는 대장정이다. 미국과의 FTA가 중국 및 일본과의 FTA 체결을 촉진하고 이 과정에서 한국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도 있다. '한.미 FTA는 곧 친미'라는 인식이 반미.반개방 세력의 조직적 저항을 부추기고 반미.반제국주의, 노동자.농민을 위한 항쟁으로까지 빌미를 주고 있다.

    더구나 한.미 FTA는 미국의 강요가 아니고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전략이다. 대통령이 올 1월 국정연설에서 추진 의사를 밝혔고 미국의 네 가지 요구조건을 우리 정부가 전격 수용하면서 2주 만에 협상 개시가 공식 선언됐다. 그러나 왜 이 시점에서 미국과 FTA를 서둘러야 하느냐에 관한 큰 그림 제시가 없었고 참여정부의 개혁 로드맵과의 연관성도 아리송했다. 외교.안보 분야에서 미국과 각을 세워온 정부가 경제 분야에서 느닷없는 러브콜을 걸어와 미국 측이 되레 당황했었다. 개성공단 제품의 한국산 인정 등 '정치적 문제'까지 들고나와 미국 측은 지금도 한국 측 진의를 의심하는 눈치다.

    국내적으로 '한.미 FTA 지지가 곧 노 정부 지지'로 통하지 않는 현실도 문제다. FTA 찬성자 가운데 노 정부 지지보다 반대자가 더 많으면 FTA 추진에 힘이 실리기 어렵다. 여권부터가 엉거주춤하고, 일부 정부부처마저 반대 내지 방관자로 엎드려 있는 사이 조직화된 반대세력만이 훨훨 날아 한.미관계에 또 하나의 결정적 긴장국면을 불러오고 있다. 반대세력에 밀려 협상이 좌초하거나 실패할 경우 '친미자주의 결정판'은커녕 양국 관계의 '파국'을 자초할 수도 있다.

    자주국방은 자주외교만큼이나 현실성이 떨어진다. 세계는 협력국방의 시대며 미국 같은 군사대국도 국제공조에 안간힘이다. 전시작전통제권은 미국이 빼앗아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감당 못해 미국에 맡긴 것이다. 환수보다는 동맹을 축으로 한 한.미 공동행사가 순리며, '자주'를 앞세운 모험은 자칫 실익은 없고 국가안보만 위태롭게 만든다. '협력적 자주국방' '친미자주'의 궁색한 '자주'보다 반미가 차라리 떳떳하다.

    미국 측은 노 정부가 많은 말을 쏟아내 아예 대응을 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웃는 낯으로 넘기고, 못들은 척하는 사이 앙금은 쌓이게 마련이다. 노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은 대북 인식과 접근법이 너무 달라 대화가 잘 안 되고 잦은 이견 노출로 신뢰에 금이 간 상태라고 한다. 9월 정상회담에서 서로 다른 얘기를 하다 보면 안 하는 것보다 못한 결과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벌써부터 나돈다. 반미보다 더 고약한 '친미자주'에 나라의 외교.안보를 맡겨두기에는 남은 1년 반이 너무 길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