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30일자 오피니어언면에 이 신문 문창극 주필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지방선거가 싱겁게 막을 내리고 있다.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열린우리당은 싹쓸이만 막아 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여론 지도를 보면 지금 이 정권은 고립된 섬이다. 나라 전체가 한나라당의 상징인 파란색이고 한두 곳만 외롭게 파란색에 갇혀 있다. 지금까지 20%대의 지지율에서 머물던 한나라당이 50%에 근접한 지지를 받고 있다. 많은 사람의 관심은 다음 대선에 쏠려 있다. 지방선거의 승리는 차기 대선에 약이 될까, 독이 될까. 가장 쉽고 정확한 답은 "한나라당 하기에 달렸다". 4년 전에도 똑같았다. 대통령선거를 앞에 놓고 그때도 한나라당은 지방선거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했다. 그때의 기세로는 한나라당이 대선에서 질 수 없었다. 그러나 지고 말았다. 왜 역사는 한나라당에 똑같은 반복의 메시지를 보내주는 것일까.

    나는 이번 승리가 한나라당을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승리 그 자체가 갖는 속성 때문이다. 이긴 사람은 언제나 우쭐하게 마련이다. 그릇이 안 되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당도 예외가 아니다. 뜻밖의 인기는 그 당을 망치게 만든다. 열린우리당 한 핵심간부는 국민이 야속하다고 했다. 공천헌금을 수억원씩 받아먹는 간부가 우글거리는 정당을 좋다고 하는 국민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여론조사에도 나타났듯이 이는 한나라당이 믿을 만하고 좋아서가 아니라, 이 정권에 너무 실망했기 때문이다.

    4년 전 이맘때 한나라당은 대통령이 다 된 줄 알았다. 지난 대선 패배 원인을 촛불시위로, 혹은 인터넷 위력 탓으로 돌리지만 사실은 너무 빨리 찾아온 승리감 때문이었다. 후보는 대통령 행세를 하고, 둘러싼 사람들은 자리 싸움으로 세월을 보냈다. 대통령 자리가 이미 따놓은 당상처럼 보였기 때문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교만했다. 한나라당은 그때보다 앞으로 더 어려운 처지에 빠질지도 모른다. 지난번은 한 후보의 독주가 문제였지만 지금은 팽팽한 두 예비후보가 경쟁하고 있기 때문에 후보 단일화를 시키지 못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다음 선거는 보수진영 후보 2명에 범여권 후보 1명이 대결하는 3자 구도가 될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경우 한나라당의 패배는 불 보듯 분명하다.

    비록 쉽게 잡은 승리이지만 장차의 약이 되기 위해서는 한 표 한 표에 담긴 외침이 한나라당 귀에 들려야 한다. "제발 손님이나 많게 해 달라"는 택시 운전사들, "직장을 갖게 해 달라"는 청년 실업자들, "강남타령 그만하고 내 집을 마련하게 해 달라"는 젊은 부부들, "나라다운 나라, 군다운 군을 갖고 싶다"는 예비역들, 이들이 던진 표 속에 담긴 아우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야당인데 무슨 힘이 있느냐"고 이제는 말할 수 없다. 이번 선거가 지방선거이니 망정이지 실제는 정권이 교체돼야 할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나라당은 야당이지만 이후는 여당의 책임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이 정권은 이미 국민의 지지를 잃었다. 일을 하고 싶어도 추진력을 끌어내기 힘들다. 벌써 친노, 반노로 갈라져 사분오열되고 있다. 그렇다고 남은 1년 반의 임기를 무정부 상태로 방치할 수는 없다. 나라가 더 이상 망가지는 것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린우리당이 아니라 한나라당이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도와주어야 한다. 나라에 꼭 필요한 일이라면 대선의 유·불리를 떠나 도와야 한다. 이 정권 임기 내에 결판이 나야 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노 대통령의 남은 임기에 도울 것은 돕고, 막을 것은 막으려면 한나라당의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지금까지와 같이 기회주의적 처신으로는 안 된다. 북한에 줄 수 있는 것과 안 되는 것은 뭔지, 강남 때리기를 반대한다면 부동산 정책 대안은 무엇인지, 평준화 교육이 문제라면 새 제도는 어떤 것인지, 민주주의 가치를 지키며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길은 무엇인지, 이런 모든 문제에 대한 입장이 있어야 한다. 반사적 지지라는 것은 신기루 같은 것이다. 그 조건이 사라지면 지지도 사라지게 마련이다.

    한나라당이 이런 자신이 있다면 1년 전 노 대통령이 제의했던 대연정을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 노 대통령도 이제는 마무리를 해야 할 때가 왔다. 지금쯤 '정파를 초월한 대통령'을 선언하고 야당에 대연정을 제의하는 것이 옳다. 국민은 여야에 관심없다. 나라의 위기에 지도자들이 힘을 합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