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일자 오피니언면 '태평로'란에 이 신문 김기천 논설위원이 쓴 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얼마 전 ‘바른 사회를 위한 시민회의’라는 단체가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을 초청해 조찬간담회를 가졌을 때의 일이다. ‘한미 FTA의 주요 현안과 정책방향’을 주제로 김 본부장의 발표와 질의응답이 있은 뒤 사회자가 이색발언을 했다. “우리 사회에 한미 FTA를 적극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다”며 김 본부장에게 힘을 내라고 한 것이다.

    그냥 인사치레로 한 말이 아니다. 기독교사회책임, 뉴라이트 전국연합, 자유주의 연대 등 중도 우파 성향의 단체들이 최근 ‘바른 FTA 실현 국민운동본부’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이들은 취지문에서 ‘한미 FTA의 방향에 공감하고 이를 추진하는 정부와 협상주체를 성원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이 정권과 이념적 대립각을 세워왔던 단체들이 정부를 편드는 국민운동까지 벌이겠다고 나선 것은 전에 없던 일이다.

    국민운동본부에 참여한 한 인사에게 이유를 물어봤다. “정부가 FTA를 하겠다고 선언은 했는데 끝까지 갈 수 있을지 걱정스러워서…”라는 대답이었다. 정부가 한미 FTA에 반대하는 세력들에 밀리지 않도록 정부에 힘을 모아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FTA 반대운동을 이끌고 있는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에 참여하고 있는 단체만도 270여개에 이른다. 이 정권 지지세력이 여기에 대거 가담했다. 이들은 ‘바른 FTA…’ 진영보다 훨씬 집요하고 극성스럽고 전투적이다. 정부가 아무리 한미 FTA의 불가피성을 설득하려 애써 봐야 잘 먹혀들 집단이 아니다. 그렇다면 정부가 과연 끝까지 ‘자기 편’과 등을 질 각오와 의지가 있느냐는 문제가 남는다. 그건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다.

    정부가 이들의 반대투쟁을 무릅쓰고 내년 3월까지 협상을 타결 짓는다 해도 그걸로 끝이 아니다. 협상 테이블에서 인정사정 없이 밀어붙이는 것으로 악명 높은 미국을 상대로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것보다 국회 비준 받기가 더 어려울 수도 있다. 대선을 앞둔 민감한 시기에 여당이건 야당이건 정부를 위해 ‘총대’를 메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미 FTA를 둘러싼 논란에는 1965년의 한일협정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많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무상원조가 끊긴 상황에서 경제개발계획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했다. ‘청구권 자금에 민족의 자존심을 팔았다’며 여론이 들끓고 반대시위가 격화돼 정권이 흔들릴 지경에 이르렀지만 계엄령과 위수령까지 발동하면서 밀어붙였다.

    지금도 한일협정을 ‘굴욕외교’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으면서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그러나 청구권 자금으로 포항제철과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는 등 한일협정이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에 초석(礎石)이 된 것도 사실이다. 정부가 여론의 반대에 밀려 한일협정을 포기했다면 한국 경제가 고도성장의 길로 내닫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한미 FTA는 한국 경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선진경제로 가기 위한 비장의 카드라는 점에서 한일협정과 비견될 만하다. ‘제2의 을사늑약’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것도 비슷하다. 과거 군사정권 때와는 달리 계엄령이나 위수령은 생각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여건이 더 나빠졌다고 할 수도 있다. 국정 최고책임자의 의지와 결단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일협정 때의 박정희 전(前) 대통령보다 더 단단히 마음먹고 나서지 않는다면 한미 FTA는 아예 시작하지 않은 것만도 못하게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