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5일자에 실린 사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은 24일 “오는 3월 3일 당 소속 의원 143명이 전국 700개 실업계 고등학교를 방문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 의장은 “실업계 고교생이 50만3000명, 학부모는 100만명이다. 못사는 집 아이들,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라는 상처를 안고 성실하게 지내고 있는 이들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게 서민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한길 원내대표는 “실업고 문제는 교육 양극화 해소의 중요 부분”이라고 했다.

    정 의장은 하루 전 대통령과의 만찬 때도 “최근 실업고를 둘러보니 대통령의 격려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이 3월 중 실업고를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다. 여당 의장이 실업고 지원 필요성을 느꼈으면 구체적인 대책을 대통령에게 건의하든가 입법조치를 취하면 될 일이다.

    뜬금없이 대통령에게 실업고를 방문하라고 하고, 여당 의원 143명 전원이 전국 실업고를 일제히 방문한다는 난데없는 소동의 앞으로 진행과정은 보지 않아도 뻔하다. 각 학교는 선거용 사진을 찍으러 찾아오는 ‘여당 의원님’들을 맞느라 학생들에게 대청소를 시키며 부산을 떨게 될 거고 모의 질문에 모의 답변을 맞춰 보는 등 학생들에게 이런저런 귀찮은 주문을 하게 될 것이다.

    정 의장이 실업고 학생 전체 이마에 ‘못사는 집 아이들,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라고 불도장을 찍은 것은 현실과도 맞지 않는다. 실업고 지원자 수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정원을 초과했다. 중상위권 성적의 중학생 가운데서도 실업고 지원자가 크게 늘어났다. 각 대학이 실업고 졸업자들에게 ‘동일계열 특별전형’이라는 유리한 기회를 주는 데다 취업률도 일반 고교에 비해 높기 때문이다. 작년 서울 실업고의 경우 전문대를 포함한 대학 진학률은 56%로 고교만 졸업하고 일자리를 찾은 41%를 크게 앞질렀다.

    아무리 선거용 의제(아젠다) 설정에 필요하다고 실업고 학생들에게 “나는 일반 고교에 다니는 ‘잘사는 집 아이들’, ‘공부 잘하는 아이들’에게 뒤떨어지는 2급 인생”이라는 응어리를 주입하는 것은 양식 있는 사람, 특히 나라를 이끌겠다는 정치인이 할 행동이 못 된다. 그런 뒤 ‘대통령과 여당 의원들은 실업고 학생들과 같은 편’이라는 특별 이벤트를 펼친들 무슨 감동이 있겠는가. 여당의 갑작스런 이런 실업고 챙기기가 지방선거를 앞두고 실업고 학부모 100만명의 표를 벌겠다는 작전인 줄 눈치 못 챌 어수룩한 국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