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선언, 단독정부론 아닌 통일정부 구상""자유민주주의 통일국가 향한 시대적 결단""이승만 대통령은 분단의 원흉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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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일 프레스센터에서 정읍선언 80주년 기념 학술회가 열렸다. ⓒ정상윤 기자
6·3 정읍선언 80주년 기념 학술회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이 정읍선언을 통해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이 제기됐다.5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6·3 정읍선언 80주년을 맞아 이승만 대통령의 독립외교와 건국노선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열렸다.이 자리에는 인보길 뉴데일리 회장, 신철식 우남네트워크 상임대표 회장, 김인성 우남네트워크 사무총장,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황준석 북미주친선협회 회장과 이병구 이화장 대표 등이 참석했다.신철식 회장은 개회사에서 "'6·3 정읍선언'은 대한민국 건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선언 가운데 하나"라며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고 공산 전체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민족을 지켜내며 궁극적으로 자유민주주의 통일국가를 이루고자 했던 시대적 결단이었다"고 강조했다.그러면서 "이번 학술대회의 주제는 정읍선언은 이승만 독트린"이라며 "정읍선언이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 살펴보고자 한다"고 말했다.이어 인보길 뉴데일리 회장은 기조연설에서 "이승만 박사의 정읍선언은 지정학적 해결책이었다"며 "이승만 박사만이 할 수 있는 역사적 전략 선언이었다"고 강조했다.인 회장은 "'이승만 독트린'이 창조해낸 우리 역사의 걸작은 바로 한미동맹"이라며 "한미동맹은 이승만 박사의 예언대로 세계 10대 선진국 K-파워를 자랑하고 있다. 전시작전통제권이 한미동맹"이라고 덧붙였다. -
- ▲ 정읍선언 학술회에 참석한 인사들이 신철식 회장의 개회사를 듣고 있다. ⓒ남수지 기자
이어 '이승만의 정읍선언, 단독정부인가 통일정부인가'라는 주제로 박명수 박사의 주제 발표가 이어졌다. 좌장은 김승욱 중앙대 명예교수가 맡았다.박 박사는 사람들이 정읍선언에 대해 어떻게 오해하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을 다뤘다.박 박사는 "이승만 박사를 비판하는 얘기를 듣지 말고 이승만 박사가 진짜했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설명했다.박 박사는 "가장 큰 오해는 이승만 박사를 분단의 원흉으로 보는 것"이라며 "단독정부를 만들려고 했고 그로 인해 통일로 가는 길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이승만 박사라는 통념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이승만 박사를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그러면서 "이승만 박사는 '임시정부나 위원회를 만들어서'라고 했다"며 "단독정부에 대해서는 이승만 박사는 '당초 누가 만들어낸 말인지 모르나 과도정부를 말한 것이었다. 경거망동하지 말자'고 했다"고 언급했다.이어 그는 정읍선언이 나온 당시 정세를 시기별로 나눠 살펴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당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해야 이승만 대통령의 발언을 정확히 해석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박 박사는 "1946년 5월 상황이 어땠느냐, 통일 정부를 만들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만들지 못했다. 사람들의 분노는 폭발했고 민중은 미국도 믿을 수 없다고 여겼다"고 했다.아울러 "이승만 박사는 단독정부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려고 했지만 실패했다"며 "이승만 박사가 입법의원선거에서 승리해서 다수파가 되게 만들었지만 하지 미군정사령관이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밝혔다.이어 "관선의원이라는 형태로 좌우합작에 유리한 구도를 만들자 이승만 박사는 하지에게 강력하게 항의했고 하지 사령관은 정권을 이승만 박사에게 맡길 수 없다고 했다"고 말했다.박 박사는 "이후 1947년 11월 유엔 총회는 한반도를 미소공위체제에서 유엔체제로 전환했다"며 "유엔이 주장하는 정부는 중앙정부였고 대한민국은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아닌 한반도 전체를 대표하는 중앙정부를 세운 것"이라고 강조했다. -
- ▲ 6.3 정읍선언 8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참석자들이 자리에 앉아있다. ⓒ정상윤 기자
이어 이은선 안양대학교 명예교수는 '이승만의 남선 순행과 정읍 선언의 의미'에 대해 주제발표에 나섰다.이승만 대통령의 남선 순행은 1946년 4월 16일부터 6월 9일까지 남한 지방을 순회하며 강연과 연설을 진행한 행사를 말한다.이 교수는 "당시 지방은 인민 위원회가 장악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순간이었다"며 "이승만 박사는 위험을 무릅쓰고 간 것이며 그만큼 미군정이나 경찰 등에서 잘 후원해줬고 많은 군중이 모였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그러면서 "이승만 박사는 남선 순행을 통해 연합군의 힘으로 우리가 해방되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우리가 독립할 능력이 있는 민족이라는 것을 전 세계에 보여줘 임시정부 수립을 해야 한다고 호소했다"고 언급했다.독립전취대회가 끝난 뒤 남선 순행을 재개한 이승만 대통령은 정읍선언을 했다.이 교수는 "이것이 계산된 발언이냐, 우발적인 발언이냐고 했을 때 상당히 계산적으로 본다"고 했다.그 이유에 대해 이 교수는 "첫 번째로 정읍선언을 할 때 미소공위가 5월 9일에 무기 휴회되었으나 양측 사이 공위재개 전망이 불투명했다"고 했다. 이에 미소공위를 통한 조선 문제의 해결을 기대하던 국민은 실망했고, 나라의 미래에 대해 불안을 느꼈다는 것이다.이어 "둘째로 미소공위를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기대도 실현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됐다"며 "세 번째로 임시인민위원회 설치와 3월의 토지개혁 실행을 비롯한 단독정부 수립을 향해 나아가는 북한 정세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끝으로 동유럽 상황에 대한 이해와 소련에 대한 불신도 주요 요인으로 꼽았다.이 교수는 "5월 9일 광주 연설에서 이승만 박사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합작 결과가 폴란드의 재판이 될 것을 우려했다"고 했다.그러면서 "이승만 박사는 동유럽의 공산화 과정을 바라보면서 남한의 임시정부 수립을 통해 우리국민의 자주적인 통일정부 수립을 달성하고자 한 것"이라며 "정읍선언은 결과적으로 남한단독정부로서 대한민국이 건국되는 출발점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