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확실히 성근은 오전과는 달랐다. 더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9분조 속에 섞여 있었다. 감시반은 9분조를 피해 다녔다. 에둘러 가는 그들의 발길이 오히려 9분조보다 더 분주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날, 9분조의 하루 작업 할당량은 누구보다 빠르게 끝났다. 하지만 먼저 손을 털 수는 없었다. 눈에 띄면 다른 작업이 떨어질 게 빤하다. 그보다 더 나쁜 건 다음날 작업량이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능률을 늦춰야 했고, 이를 위해 자연스러운 연기를 필요로 했다. 개성이 없다던 도련님이, 그날따라 제일 극성스러웠다.

    그는 성근이에게 행동이 느려져야 할 타이밍의 요령을 설명했다. 지쳤다는 신호는 얼굴에, 가쁜 숨은 코끝에, 탈진은 어깨에 올려놨다.

    "이럴 땐 이렇게 하는 거야."

    그는 무리하게 직접 시범을 보여줬다. 흙 마대를 들고 걷다가 마치 기절한 사람처럼 최종배 앞에서 고꾸라졌다. 김성근의 눈엔 도련님이 엎어진 김에 그냥 자는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엎드려 있으니까 최종배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얼굴엔 의심과 흥미가 동시에 비꼈다. 왼 손목을 들어 올렸다. 시계는 없었다. 하지만 그도 연기가 필요했다.

    시계 있는 남자라는 것과 초를 세고 분 단위로 벌을 정하겠다는 협박이었다. 그런데도 녀석은 꿈틀대기만 하고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최종배는 히죽 웃었다. 죄수 경력이나 보위원 경력이나 결국 같은 울타리 안에 갇혀 살았다. 그래서 그도 궁금했다. 이놈이 과연 어디까지 선을 넘는지. 그를 통해 반동의 한 경우를 자기의 경력 속에 넣어두고 싶었다.

    마침내 도련님은 이쯤이면 되겠지 싶어 머리를 지렛대 삼아 일어나는 시늉을 했다. 뒤집어 보이는 9분조, 그중에서도 특히 김성근의 시선과 슬쩍 부딪혔다. 그러자 무릎을 떨며 손에 힘을 주었다가 또 쓰러졌다. 아예 처음부터 반복할 작정인지 다시 느려졌다.

    최종배는 피우던 담배꽁초를 툭 내던졌다. 그 불똥은 정확히 도련님의 목덜미 위에 떨어졌다. 그 순간 도련님의 몸이 바닥에서 튕겨 올랐다. 그 민첩함이 곧 남아 있던 힘의 증거였다. 어깨와 허리가 따로 놀 만큼 관절과 근육마다 기운이 넘쳤다.

    최종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빨리 오라는 그 짧은 손짓만 했다. 그건 '너는 끝났다'는 것과 동시에 '이제 시작'이라는 소용돌이였다. 그러던 그가 어딘가를 보고 표정을 바꾸며 일어섰다. 가족세대 담당 보위원 지형철이 걸어오고 있었다.

    "너, 일단 가서 일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련님은 방금까지 기절했던 사람 같지 않게 냅다 뛰어갔다. 최종배는 그것도 나중에 추가 죄목에 포함했다. 

    지형철은 노란 금속 담배 케이스부터 열어 두 개비를 꺼냈다. 공동작업이 있는 날이면 남자 보위원들끼리 종종 담배를 나눴다.

    보위원은 누군가를 내려다보고 억누르고 감시하기 위해 온종일 척추를 똑바로 세워야 했다. 몸이 아닌 존재 전체가 긴장된 자세였다. 그들에게 담배 연기는 단순한 흡연이 아니었다. 수백 명의 울분과 분노를 다스리며 거칠어지고 답답했던 호흡을 열어주는 숨이었다. 그리고 그 짧은 틈에 수용자들 또한 긴장을 풀 수 있는 숨을 쉬었다. 한쪽은 담배로 버티고 다른 쪽은 제 목젖으로 숨을 골랐다.

    "홍신영 그년 말입니다."

    최종배가 하는 말이었다.

    "전번 생활총화 때 상위동지한테 호상비판하는 걸 보니... 아니 그 미친 년은 죄수건 동지건 일단 사람이면 다 잡자는 년 아닙니까?"

    "열등감이야. 그 화풀이고, 남 잡아야 편안해지는 그것도 정신병이지. 늙을수록 불행해질 팔자고."

    보위원들은 자기 숨을 쉴 때는 수용자 욕을 하지 않았다. 자기들의 삶과 그 속에 있거나 비껴간 것들에 대한 가벼운 토로 정도로 그친다. 갇힌 삶을 사는 탓에 어디 쏟아낼 데도 없어 한담이라도 비교적 솔직했다.

    "독신자 담당 좋은 게 딱 하나가 있습니다. 그런 년이랑 엮이지 않고 저 혼자인 거."

    최종배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지형철은 대꾸 없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들은 연거푸 두 개비를 피웠다. 담뱃불이 오가고 연기도 합쳐졌다. 허공에 풀리는 연기 너머로 흙 마대를 어깨에 멘 김성근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최종배의 기억과 시선에서 도련님을 지우려고 일부러 그 앞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고개를 들던 지형철이 멈칫했다. 그는 수용자의 몸을 보고 놀란게 아니었다. 그보다 그의 얼굴에 더 심하게 놀랐다. 김성근도 눈이 마주치자 걸음을 돌렸다. 반사적인 회피였다. 그걸 본 지형철이 자기도 모르게 소리가 튀어나왔다.

    "야! 너, 잠깐 서 봐."

    김성근의 걸음이 멈췄다. 그러나 등은 여전히 돌아서 있었다.

    이번엔 최종배가 지형철 대신 버럭 소리쳤다.

    "이 새끼가. 선생님 부르는데 그러고 있어? 똑바로 서지 못해?"

    김성근은 마지못해 돌아섰다. 그리고 지형철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고개를 푹 떨구었다. 지형철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번졌다. 담배 연기에 목이 걸려 기침하며 몸을 획 돌렸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처럼 한마디 했다.

    "…갈게."

    "벌써 말입니까?"

    지형철은 최종배가 묻는 말을 못 들은 태도로 자리를 피했다. 그가 남긴 담배 연기는 안개처럼 자욱했다. 지형철은 그 길로 지휘부 대열부를 찾아갔다. 대열참모에게 작업장에서 봤던 김성근의 수번을 말하고 그의 신상서류를 넘겨받았다.

    서류를 뒤적이다가 '불법적인 종교활동'이라는 죄명 앞에서 무심코 금속 담배 케이스를 열었다. 하지만 스스로 놀라며 황급히 다시 닫았다. 손끝이 약간 떨렸다. 겉 표정은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그의 눈동자 아래로 무언가가 흔들리고 있었다.

    대열부 벽면에는 관리소 보위원 준수사항이 나열돼 있었다. 과거 동향, 동창. 사제. 애인 관계를 자진 신고하지 않으면 출당, 해임, 구속조치 한다는 관리소 근무자 원칙이었다.

    지휘부를 빠져나온 지형철은 곧장 립석강 강가로 향했다. 잔잔한 물결이 수면 위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는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혼자였다. 금속 담배 케이스가 활짝 열려 있었다.

    케이스 안에는 한 장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그는 그 사진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지금보다 훨씬 앳된 얼굴의 김성근과 지형철이 있었다. 그 속에서 웃고 있는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소꿉친구였다. 왜소했던 지형철은 어릴 적 동네 불량배 형들에게 자주 맞곤 했다.

    그때도 김성근은 또래보다 몸집이 크고 뚱뚱했다. 그의 고집 속엔 나이를 불문하고 체통만 있었다. 상대의 나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불량배 형들에게도 그르다 싶으면 곧장 달려들었다.

    지형철이 얻어터지고 돌아오면 꼭 끌어안고 위로해주었다. 그런 다음 때린 애의 집에 몰래 들어가 장독대에 나란히 서서 오줌도 갈겼다. 그런데도 김치를 맛있게 먹는 가족의 웃음을 볼 때는 기어코 똥도 같이 쌌다. 복수의 날이 반복되며 둘은 장독이 옮겨져 있던 창고에 불까지 질렀다. 그 일로 붙잡혔을 때 김성근이 혼자 다뒤집어썼다. 소년교화소에서 1년을 보냈다. 자기 대신 고생하고 나온 김성근을 지형철은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날도 둘은 교화소 담장에 대고 오줌 싸며 같이 웃었었다. 그때는 마주 보며 웃는 것도 식상해 서로의 어깨에 기대고 방귀에 휘청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둘이 함께 서서 오줌 쌀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한쪽은 이름인데 다른 쪽은 번호였다. 지형철은 강가에 앉아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한참을 보고도 다시 더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에선 둘이 웃고 있는데 지금은 아무도 웃지 않았다. 메마르게 부는 바람에 햇살이 지워지고 희미해졌다.

    지형철은 담배를 물었지만 불을 붙이지 못했다. 라이터를 내려놓고 그 손으로 케이스 속의 사진을 조심스럽게 뒤집어놓았다. 추억 속에 숨 쉬는 본래의 자기 얼굴도 지워진 것 같았다.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