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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 이순재.ⓒ아이엠티브이
"예술이란 영원한 미완성이다. 그래서 나는 완성을 향해 끝없이 도전한다."
25일 새벽, 영면에 든 국민 배우 이순재(91)의 생전 어록이 재조명되고 있다. 고령의 나이에도 영화, 드라마, 연극, 예능을 넘나들던 고인은 지난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와 KBS 2TV 드라마 '개소리'에 출연하며 마지막까지 배우로서 연기 인생을 바쳤다.
고(故) 이순재는 올해 1월 열린 '2024 KBS 연기대상'에서 생애 첫 대상 수상의 기쁨을 누렸다. 수상 당시 그는 "언젠가는 기회가 오겠지 하면서 늘 준비하고 있었는데 오늘 이 아름다운 상, 귀한 상을 받게 됐다. 1962년 KBS와 처음 인연을 맺었던 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다'이다. 그동안 대상은 이순신 장군이나 역사적 인물을 연기했던 출연자들이 주로 받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의 캐서린 헵번은 60대 이후에도 세 번이나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공로상이 아니라 연기상이었다. 연기를 잘하면 나이가 60을 먹어도 상을 주는 것이다. 연기를 연기로 평가해야지 인기나 다른 조건으로 평가하면 안된다"며 "지금 지켜보고 계실, 시청자 여러분. 여러분께 평생 신세 많이 지고 도움 많이 받았다. 감사합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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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 KBS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한 배우 이순재.ⓒKBS
지난해 5월 열린 '제60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오디션에 참가하는 원로 배우의 모습을 선보여 큰 감동을 남겼다. 이날 이순재는 "우리 나이로 90세가 된 이순재다. 1956년 연극 '지평선 넘어'로 시작했다. 올해로 데뷔 69년차다. 드라마는 작품 편 수로 175편 정도, 횟수는 몇 천 편 된다. 영화도 150편 정도, 연극은 100편 미만이지만 숫자를 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털어놨다.
연기 철학에 대해 "대본 외우는 건 배우로서의 기본이다. 대본을 외우지 않고 어떻게 연기를 하나. 배우의 생명은 암기력이 따라가야 한다. 대본을 완벽하게 외워야 제대로 된 연기를 할 수 있다. 대사를 말하는 게 아니다. 혼을 담아서 표현해야 하는데 대사를 못 외우면 혼이 담겨지나. 대사 외울 자신이 없으면 배우 관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배우로서 연기는 생명력이다. 내가 몸살이 걸려 누워있다가도 '레디 고(큐사인)'하면 벌떡 일어나게 돼 있다. 그런데 연기가 쉽지가 않다. 평생을 연기했는데도 아직도 안 되고 모자란 데가 있다. 그래서 늘 고민하고 연구하고 새 배역이 나올 때마다 참고한다"며 "배우는 항상 새로운 작품, 새로운 역할에 대한 도전이다. 똑같은 걸 반복하는 게 아니다"고 덧붙였다.
이순재는 현장에서 꼰대 노릇 없는 진정한 어른으로 평가받는다. tvN 예능 '꽃보다 할배' 시즌3 방송을 통해 "나이 먹었다고 주저앉아 대우나 받으려는 것은 늙어 보이는 것이다. 인생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앞으로 쭉 가면 된다. 이제 우리 나이쯤 되면 닥치면 닥치는 대로 살아야 한다. 나는 당장 내일 할 일이 있으니까, 끝을 생각하기보다 현재에 최선을 다해야지 팔십이라는 것도 잊고 '아직도 육십이구나' 하며 산다"고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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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공연 사진.ⓒ파크컴퍼니
2022년 12월 개막한 연극 '갈매기'로 첫 연출에 도전한 이순재는 2023년 1월 YTN '뉴스큐'에 출연해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다. 우선 배우가 살아야지 그외에 장치 등 아무 의미가 없다. 배우가 살아야 작품의 내용과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 특히 문학성, 철학성, 사상성이 내포돼 있는 '갈매기'에서는 탁월한 연기력이 수반되지 않으면 전달할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2018년 TV조선 '스타다큐 마이웨이'에선 "내가 미쳐서, 좋아서 이 길을 선택했기에 대사를 외울 수 있을 때까지는 연기하고 싶다. 매 작품이 유작이라는 생각으로 임한다"고 했다. 2023년 같은 프로그램에서 연극을 하는 이유에 대해 "배우는 연기할 때 생명력이 생긴다, 그땐 모든 걸 다 초월한다. 그래서 내 소망은 무대에서 쓰러지는 거다, 그게 가장 행복한 것"이라고 전했다.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이순재는 4살 때 조부모를 따라 서울로 내려왔다. 호적상으로는 1935년생이다. 서울고·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1956년 연극 '지평선 넘어'로 데뷔했다. 1960년 KBS 1기 탤런트 출신으로, 1961년 KBS 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다'로 TV 연기 활동을 시작했으며, 1965년 TBC 1기 전속 배우가 됐다.
그는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 '베토벤 바이러스', '허준', '이산',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등 세대를 아우르는 다채로운 작품에서 존재감을 보여줬다. 여행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에서도 활약하며 '직진 순재'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최근까지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쳐왔으며, 2024년에는 대한민국 연극제에서 명예 대회장을 지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오는 27일 오전 6시 20분에 엄수되며, 장지는 이천 에덴낙원이다. 상주에는 아내 최희정 씨를 비롯해 두 자녀가 이름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