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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명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1일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한중 정상회담 기념촬영을 한 후 자리로 향하고 있다. ⓒ뉴시스
이재명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1일 첫 정상회담에서 한중 통화 스와프를 비롯해 경제·문화·범죄 대응 분야에서 7건의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며 한중 관계 복원의 서막을 열었다. 그러나 중국이 서해 한중 잠정조치수역(PMZ)에 사실상 '인공섬'을 건설하며 한국의 핵심 이익을 침해하는 이른바 '서해공정' 문제는 원론적 언급만 오가는 데 그쳤다.
이를 두고 외교가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한중 회담을 불과 사흘 앞두고 핵(원자력)추진 잠수함 연료 공급 문제를 '공개 의제'로 꺼낸 것이 외교·국방적 국가 이익을 놓고 봤을 때 순서상 실책이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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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명 대통령이 29일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천마총 금관 모형'을 선물하고 있다. ⓒ뉴시스
◆李 대통령, 원자력추진잠수함 연료 공급 문제 공개 의제화이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핵추진잠수함(핵잠) 연료 공급 의제'를 공개적으로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이 대통령은 "디젤 잠수함은 잠항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북한이나 중국 측 잠수함에 대한 추적 활동에 제한이 있다"며 "연료 공급을 허용해 주시면 저희가 저희 기술로 재래식 무기를 탑재한 잠수함을 여러 척 건조할 수 있고, 이 잠수함들이 한반도 동해와 서해를 순찰·방어해 미군의 작전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핵연료 이전이 이뤄지면 한반도 주변 해역의 순찰·감시 역량이 크게 강화돼 미군의 작전 부담을 덜 수 있다는 논리였다. 동시에 이는 한국이 사실상 무제한 잠항할 수 있는 핵잠을 보유한다면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중국 인민해방군의 잠수함을 추적함으로써 미국의 대중국 견제에 기여하겠다는 의미라는 해석을 낳았다.이에 대통령실은 당일 언론 공지를 통해 '북한이나 중국 쪽 잠수함'은 "특정 국가의 잠수함을 지칭한 것이 아니다. 단순히 북쪽, 중국 방향의 우리 해역 인근에서 출몰하는 잠수함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이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전술적으로 대중 견제 동참 의중을 시사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는 이유다. 다만 엄밀히 따지면 핵잠 연료인 농축우라늄 공급을 요청한 이 대통령의 발언은 민수 협력만을 허용하는 현행 한미원자력협력협정(123 협정) 조기 개정을 간접적으로 촉구하되, 핵잠 자체는 국내 기술로 건조하겠다는 취지였다.◆트럼프 대통령, 핵잠 연료 공급→美 조선업 재활성화 프레임 전환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핵잠 연료에서 미국 내 핵잠 건조로 프레임을 미국 산업 활성화 중심으로 순식간에 전환했다.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을 통해 "한미 군사동맹은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다"며 "그것에 기반해 나는 한국이 현재 보유한 구식이고 기동성이 떨어지는 디젤 잠수함 대신 핵잠을 건조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고 밝혔다.그러면서 "한국은 핵잠을 바로 여기 훌륭한 미국 필라델피아 조선소(한화오션이 인수한 미국 필리조선소)에서 건조할 것"이라며 "미국의 조선업은 곧 대대적인 부활(Big Comeback)을 맞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 ▲ 2010년 이후부터 2025년 4월까지 중국이 서해에 설치한 해양관측 부표와 해상 플랫폼 등 각종 해양 구조물의 위치 현황을 해군 협조로 엄태영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6월 3일 공개했다. ⓒ엄태영 국민의힘 의원실 제공
◆中, '비확산 원칙' 명분 내세워 견제 … 서해공정, 정상회담서 형식적 언급만
그러자 중국은 자국이 한국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핵 비확산 의무라는 원칙론을 내세웠다.
궈자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같은 날 정례 브리핑에서 "중국은 한미 양국이 핵 비확산 의무를 실질적으로 이행하고, 지역 평화·안정을 촉진하는 일을 하지 그 반대를 하지 않기를 희망한다"며 "중국은 평화 발전의 길을 걷고, 방어적 국방 정책과 선린 우호의 외교 정책을 수행하며, 시종일관 지역 평화와 안녕을 수호하는 튼튼한 기둥이었다"고 강조했다.
이틀 뒤 한중 정상회담은 한중 관계 복원의 형식은 갖췄지만, 한국의 핵심 이익에 직결된 서해 구조물 문제는 원론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형식의 복원'과 '현안의 진전' 사이에 여전히 괴리가 남았다. 위성락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은 회담 직후 브리핑에서 '중국의 한화오션 제재와 서해 구조물, 한한령 해제 문제 등에 대한 진전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서로 실무적인 협의를 해 나가자, 소통하면서 문제를 풀어보자는 공감대가 있었다"고 답했다.
이어 "좋은 논의가 있었다"면서 두 정상 간 대화에 대해서는 세세한 소개나 확인을 하지 않는다는 입장임을 밝혔다.
비공개 회담에 배석했던 인사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핵잠 도입은 우리가 처한 분단 상황에서 방어권 차원의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취지를 시 주석에게 직접 설명했고, 시 주석은 "유의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중국 외교에서 이러한 답변은 상대방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거부하지 않지만 수용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상 '무응답형 거절'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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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명 대통령이 8월 26일(현지 시간) 필라델피아 한화 필리조선소를 방문해 방명록에 서명한 뒤 조시 샤피로 펜실베니아 주지사와 악수하고 있다. ⓒ뉴시스
◆先 핵잠 공제 의제화-後 서해공정 문제 제기 … '순서 오류'의 비용
첫 한중 정상회담이라는 현실론을 감안해도, 선(先) 한미 트랙에서 핵잠을 공개 의제로 올리고 후(後) 한중 트랙에서 서해공정에 대해 정상 차원의 원론적 합의조차 이르지 못한 '순서 오류'의 비용이 작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핵잠 이슈는 미 의회·행정부 내 비확산 공론과 산업·예산 변수, 동맹 내 역할 조정까지 얽힌 복합 의제다. 비공개 트랙에서 정책적 조율을 선행한 뒤 공개 메시지는 최소화하는 것이 외교의 정석이다. 그런데 '연료 공급' 의제가 올라오면서 논점은 단숨에 공개 영역으로 이동했고, 당장 다음 날 미국 측의 '미국 내 건조' 프레이밍이 겹치며 협상 축이 연료에서 핵잠 건조와 미국 내 산업 활성화로 선회했다.
이에 대해 과거 중국에서 근무한 전직 외교부 당국자는 "한미 관세협상이 기대 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자, 이 대통령이 핵잠 이슈를 성과 보완용 카드로 꺼내 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며 "관세와 안보에 대한 합의문이 나와야 할 때에 이제야 양해각서(MOU)나 팩트시트를 준비하겠다는 것인가. 결과적으로 핵연료 공개 의제화는 외교적 초점을 흐리고 협상 구도를 뒤틀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전직 안보 관료는 "이 대통령은 핵잠 문제를 굳이 공개 석상에서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핵잠 도입 취지가 대중 견제 목적임을 피력한다면 비공개 자리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결국 그 발언은 중국을 미리 자극한 것은 물론, 사흘 뒤 한중 정상회담에서 협상 여지를 좁히는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했다.
◆장기 카드와 단기 위협의 교환 … 좁아진 전략적 여유
특히 이 대통령의 선택은 임박한 위협을 먼 미래의 카드와 맞바꾼 셈이라는 점에서 더 큰 비판을 받고 있다. 핵잠은 설계·원자로 인증·시험평가·전력화까지 최소 10년이 걸리는 '장기 프로젝트'다.
반면 서해공정은 남중국해 전례에서 나타나듯 2~3년 안에 기정사실이 될 수 있는 '속도전'이다. 즉, 핵잠이라는 장기 전략카드를 공개적으로 끌어 올림으로써 서해공정이라는 임박한 위협을 다룰 외교적 자원을 스스로 제약한 양상이 됐다.
한중 정상회담을 불과 사흘 앞둔 시점에서의 공개 언급은 중국에 협상 주도권을 내준 채 서해공정 문제를 원론 수준에 묶어두는 '비대칭적 구도'를 낳았다.
더욱이 문재인 정부의 사례는 핵잠 보유라는 한국의 숙원 과제가 또다시 좌절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트럼프 대통령은 1기 집권 당시 한국의 핵잠 도입 요청에 긍정적인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최종건 전 외교부 1차관의 회고에 따르면,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첫 회담에서 핵잠 도입을 거론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왜 한 대만 필요하냐, 두 대를 사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 국방부와 의회가 비확산 원칙과 군용 핵연료 이전 금지 조항을 이유로 반대하면서 한국의 숙원 과제는 실현되지 못했다. 이는 핵잠 보유는 행정부 의사만으로 추진이 어렵고, 이번 '핵연료 승인'도 실질적인 의미를 갖기 어려운 현실을 보여준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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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해 잠정조치수역(황색 음영)과 중국이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작전 경계선'(동경 124도선·적색 점선) 일대는 한국의 배타적경제수역(EEZ·청색선)과 겹쳐 있다. 최근 중국이 이 구역에 고정 구조물과 선박을 잇달아 설치하면서 해양 주권 침해 논란이 커지고 있다. 2010년 이후부터 2025년 4월까지 중국이 서해에 설치한 해양관측 부표와 해상 플랫폼 등 각종 해양 구조물의 위치 현황을 해군 협조로 엄태영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6월 3일 공개했다. ⓒ엄태영 국민의힘 의원실 제공
◆최적 해법과 정반대로 간 순서 … 협상 전략의 균형 무너뜨려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정책적 순서만 놓고 봐도 최적 해법은 반대였다고 지적한다. 핵잠 문제를 비공개 채널에서 기술적·법적 제약과 제도적 절차를 먼저 정비하고, 공개 메시지는 최소화하는 것이 외교 관행에 부합한다는 의미다.
한미 원자력협정의 조기 개정 가능성, 별도 협정 체결 여부, 연료 농축도와 사찰, 예산 및 산업 분담 구조 등은 사전에 조율해야 하는 항목이었다.
서해 불법 구조물 문제는 국제법과 한중 어업협정의 절차에 따라 '사실 확인-공동조사-재발 방지' 순으로 명시하고, '국민적 우려가 크다'는 사실을 정상급 메시지로 전달했다면 협상력을 높일 수 있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즉, '비공개 조율 부족'이 협상 전략의 균형을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특히 핵잠용 연료 이전 문제는 긴 협상 과정을 수반하는 일이다. 학계에서는 핵잠 연료 이전은 한미 원자력협정 조기 개정이 필요한 사안이라는 주장과 별도 협정 체결이 필요하다는 해석이 갈리고 있다.
한미 원자력협정은 비핵국가에 대한 군용 핵연료 이전을 금지하지만, 국제원자력기구(IAEA) 안전조치 모델(INFCIRC-153) 제14항은 해군 함정 추진용 비폭발성 핵물질을 예외로 규정한다.
미국·영국이 2021년 9월 비핵국가인 호주와 '오커스(AUKUS) 협정'을 체결하고 핵잠을 공급하기로 한 것은 NPT의 허점을 활용한 최초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협정이 체결된 지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호주는 핵잠 인도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한국도 협정 체결 이후 실제 기술 이전과 연료 공급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북한의 NPT 탈퇴와 사찰 회피에 침묵했던 중국이 한국의 핵잠 보유 추진을 문제 삼는 것은 논리적 일관성이 떨어지므로 중국은 표면상 강한 반발은 자제할 것"이라며 "사실 말이 핵잠일 뿐 핵무기를 탑재하는 게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한국의 핵잠 도입은 중국 해군의 작전반경을 상쇄하는 변수라는 점에서 중국은 이를 외교 카드로 지속 활용할 가능성이 크다"며 "결국 한국 외교의 전략적 여유는 좁아질 수밖에 없으며 동맹 중심 외교 노선의 틀 안에서 대외 메시지를 일관되게 조율하는 일이 지금으로선 유일한 해법에 가깝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