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실한 佛信者' 모친 영향 받아건국 초기, 왜색 불교 퇴출 앞장정화유시로 비구승 전통 되살려식민지유산 척결 의지 기억해야
  • ▲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에 자리 잡은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 ⓒ정상윤 기자
    ▲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에 자리 잡은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 ⓒ정상윤 기자
    최근 불교의 양대 산맥인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총무원과 한국불교태고종(韓國佛敎太古宗) 총무원 사이에 위치한 '열린송현녹지광장'이 '이승만대통령기념관'의 유력한 부지 후보로 떠오르면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불교에 배타적이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을 대한민국 불교의 성지(聖地)에서 기념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항간에 떠돌고 있다.

    일각에서는 "기독교 신자인 이승만 전 대통령은 불교를 최일선에서 탄압했던 장본인"이라며 신라·고려시대 국교(國敎)로 위세를 떨치던 불교가 '산중불교'로 전락한 건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편 조선시대와 '숭기억불(崇基抑佛)'을 했던 이승만 정권 때문이라는 기막힌 말도 나온다.

    이 같은 주장은 대한민국 건국 초기(1954~1962년) 단행됐던 '불교정화(佛敎淨化)운동'에서 비롯됐다. '정화불사(淨化佛事)'로도 불리는 이 운동은 당시만 해도 대한민국 불교의 주류였던 대처승(帶妻僧)을 배제하고 비구승(比丘僧)을 중심으로 '한국 전통 불교'를 재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 전 대통령을 폄훼하는 세력은 당시 이 전 대통령이 "대처승은 물러가라"는 요지의 '불교정화유시(佛敎淨化諭示)'를 내려 불교계의 분열과 갈등을 조장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실제로 이 전 대통령은 1954년 5월 21일 "우리 나라 각지 명산에 있는 사찰은 독신 승이 모여 수도하는 도량으로 세속의 처자 살림을 하지 않는 것이 고유한 전통인데, 왜정 하에서 한국 승려들도 왜색승을 본받아 사원 안에서 대처 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이 나라의 명산대찰이 세속화하여 외국 관광객이 오더라도 보여줄 것이 없으므로 대처승은 사찰 밖으로 물러가서 살게 하고, 절에는 독신승이 살도록 하여야 되겠다"는 1차 유시를 발표했다. 이 같은 취지의 유시는 1955년까지 총 8차례 발표되며 불교계를 뒤흔들었다.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국내 최대 종교의 역린(逆鱗)을 건드리는 말은 쉽지 않았을 터. 그럼에도 이 전 대통령이 용기를 내 불교정화운동을 밀어붙인 이유는 당시 공포된 '정화유시'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일본식 불교'를 우리나라에 전파하기 위해 들여온 '대처승'이 국내 불교를 장악해 '비구승'으로 대변됐던 전통 불교가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는 것. 이 전 대통령은 다름아닌 '전통 불교'를 살리고 '왜색 불교'를 몰아내자는 취지로 이러한 유시를 내렸다.

    대처승은 '아내나 자식을 둔 승려'를 가리키는 불교 용어로, 불교는 전통적으로 승려의 결혼 생활을 금지하고 있으나 일본에서는 출가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비구승보다 대처승이 우세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대처승과 비구승 모두 불도(佛道)를 닦고 행하는 수행자라는 점에서 존중받아야 마땅하고, 우열을 가린다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몸은 비록 세무(世務)를 경영할지라도 마음으로 불법을 생각하는 자는 승려"라며 승려의 범위를 넓게 해석하고 있는 한국불교태고종은 현재 비구불교인 대한불교조계종과 함께 국내 불교계를 양분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문제는 건국 초기 번성했던 대처승들의 모습이 지금의 숭고한 태고종과는 사뭇 달랐던 것. 조계종 불교신문 편집국장을 지낸 법철 스님이 2012년 본지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1911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우리나라 불교를 장악 이용하기 위해 사찰령(寺刹令)을 제정하고, 남북한에 31본산(本山) 제도를 조직해 본사주지는 총독부에서 승인했고, 본사의 산하 말사(末寺)인 1384의 주지는 도지사가 승인해야만 주지를 할 수 있도록 했다. 본사와 말사의 주지는 일제의 대처불교(帶妻佛敎)를 지향해야만 우선권을 줬다. 돈과 권력이 있는 주지를 하기 위해서는 △첫째, 결혼을 하고 △둘째, 돈을 마련해 총독부 관계자나 도청의 관계자에게 아부를 하지 않을 수 없고 △셋째, 무조건 일제의 강요와 지침에 복종해야 했었다는 게 법철 스님의 주장이다.

    과거엔 결혼하지 않는 독신승이 주를 이뤘으나, 일제시대에는 조선총독부의 농간으로 대처승은 장려되고 비구승은 거의 도태되다시피 했다는 게 불교계의 정설이다. 일례로 시인인 만해(萬海) 한용운도 두 명의 부인과 자녀를 둔 대처승이었다.

    당시 조선의 승려들은 거의 일제의 정책에 순응해 대처승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가운데도 불교의 전통을 고수하는 독신승들이 있었다고. 그러나 비구승은 7000여 명이 넘는 대처승에 비하면 기십 명에 지나지 않는 극소수였고, 대처승들에게 밀려 은둔 속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상황에 이 전 대통령이 '비구불교'를 부활시키는 유시를 내렸으니 불교계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기독교 신자인 이 전 대통령이 비구불교의 중흥을 위해 발벗고 나선 이유는 이렇다. 이 전 대통령의 모친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는데, 북한산 문수사(文殊寺)에서 부처님께 기도한 끝에 꿈속에서 용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이 전 대통령을 회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와 같은 연유로 이 전 대통령은 모친과의 추억이 있는 문수사를 자주 찾았고, 문수사에 오르는 신작로(新作路)를 닦기도 했다. 손수 붓글씨로 '문수암'이라는 편액을 써 문수사 앞에 단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하루는 이 전 대통령이 미국 고위 정치인에게 우리나라의 전통 불교를 소개하기 위해 이익홍 내무장관, 갈홍기 공보실장, 최헌걸 경기도 지사를 대동하고 정릉 경국사를 방문했다.

    그런데 사찰에서 아기 기저귀를 빨고 있는 젊은 여인과, 빨랫줄에 여자의 내복 등이 걸려 있는 것을 목격하고 화들짝 놀랐다. 대경실색한 이 전 대통령은 자신이 초청한 국빈에게 이러한 풍경을 보여주기 싫어 그를 법당 쪽으로 안내했다. 하지만 법당 안에는 더욱 경천동지할 '흉물'이 드리워져 있었다. 긴 주련(柱聯)에 "황군무운장구(皇軍武運長久) 천황폐하수만세(天皇陛下壽萬歲)"라는 글귀가 있었던 것. 이는 경국사 승려들이 조석 예불 때 사용하던 기도문이었다.

    일제를 위해 기도하던 기도문이 여전히 법당에 걸려 있는 것을 본 이 전 대통령은 안내하는 주지에게 "왜 저 글씨를 걸어놓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주지는 태연스레 "왜정 때 그렇게 써 놓은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에 격노한 이 전 대통령이 '일제 불교'의 잔재를 뿌리 뽑고자, 전통 비구불교를 재건하는 유시를 내린 것이라는 게 법철 스님의 설명이다.

    결국 이 전 대통령의 불교정화에 대한 결연한 의지로 비구승이 재건됐고, 1962년 12월 '불교재산관리법'에 의해 '대한불교조계종'이 태동하는 계기가 마련됐다.

    불교계에 따르면 1970년 1월 15일 승려 진종(속명 박대륜)을 종정으로 출범한 '한국불교태고종'은 고려 말기의 고승이었던 원증국사 태고 보우를 종조(宗祖)로 하고 있다. 대처승을 인정하는 이 종단 역시 한국 전통 불교를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전 대통령이 불교정화유시를 내린 건 부패한 '왜색 불교'를 몰아내자는 것이지 불교를 배척하려는 게 결코 아니었다. 당시 이 전 대통령은 '농지개혁'을 하면서도 사찰의 농지는 '불전의 공양과 비구승들의 공양'이라는 것을 감안해 "사찰의 농지는 사찰로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전국 대소 공찰(公刹)에 비구승이 살 수 있도록 조처를 내려 오늘날까지 불전공양과 수도승들의 공양에 이바지 한 장본인이 바로 이 전 대통령이다.

    그런 이 전 대통령을 불교계가 반대할 이유가 있을까? 이 전 대통령은 비록 친기독교 성향의 인물이었으나, 그의 영혼의 뿌리에는 독실한 불교 신자인 어머니의 영향이 있었다는 게 이 전 대통령을 연구해 온 역사학자들의 중론이다.

    원로 지식인 사이에선 재임기간 '식민지 유산'을 없애고자 했던 그의 취지를 외면하고 '불교계의 갈등을 유발했다'는 주장만 내세우는 건 대한민국의 발전과 정체성에 큰 퇴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이 전 대통령의 격언을 되새겨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