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료를 없애자"는 건‥ "공영방송을 없애자"는 논리KBS와 구성원들의 '뼈를 깎는' 반성과 개선 노력 필요대안 없이 '수신료 폐지' 압박…집권당 취할 태도 아냐
  • ▲ 영국의 공영방송사 BBC.  ⓒBBC 공식 홈페이지 캡처
    ▲ 영국의 공영방송사 BBC. ⓒBBC 공식 홈페이지 캡처
    1920년 미국 피츠버그에서 최초의 라디오 방송 KDKA가 송출되었다. 연이어 1922년 영국에서는 BBC 전신인 BRC가 방송을 시작하였다. 그러니 영국은 올해가 방송 100주년 되는 해인 셈이다. BRC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전쟁용 무선기를 제작·공급하던 회사들이 민간에게 무선기를 팔아먹기 위해 설립한 일종의 미끼상품 같은 것이었다. 어쩌면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의 부산물인 셈이다.

    그러니 처음에는 직접 제작하는 프로그램도 많지 않았고, 뉴스도 종이신문을 읽어주는 수준이었다. 당연히 프로그램 내용도 허접하고 저질스럽게 느낄 수도 있었다. 이런 BBC를 상업방송과 차별화된 공영방송으로 만든 사람이 존 라이스 경이다. 그는 BBC는 마치 아이를 선도하는 부모와 같은(paternalistic) 도덕적 매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BBC가 시장과 정치로부터 독립된 공영방송의 상징적 존재가 된 배경이다.

    1928년 영국 왕실은 칙허장(royal charter) 제도를 통해 정부가 관리하는 공영방송으로 재출범하게 된다. 이후 많은 나라들이 BBC를 모델로 한 공영방송을 설립하였다. 물론 나라마다 정치·사회적 배경이 다르고 방송에 대한 인식도 차이가 있다. 하지만 지난 100년 동안 BBC는 공정하고 정확하고 품위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공영방송의 이상형(ideal type)으로 군림해왔다. 심지어 1961년 FCC 의장 미노우도 상업방송이 판치는 미국 방송시장을 ‘거대한 황무지(vast wasteland)’에 비유하면서 BBC 같은 공영방송 필요성을 제기했을 정도다.

    BBC 존립 근거는 상업방송과의 차별화,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 그리고 재정적 독립이다. 앞의 두 근거는 세 번째 재정적 자립을 보장하는 전제조건이라 할 수 있다. 즉, 두 조건을 전제로 독립된 재정인 수신료를 보장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법적으로 BBC 수신료는 방송 수신에 필요한 주파수 이용 대가를 징수하는 조세 형태로 되어있다. 다만 수신료 징수와 사용에 정부가 직접 관여하지 않고, BBC 이사회가 자율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BBC 수신료를 2027년에 종료하겠다는 소식이 들린다. 표면적 이유는 수신료 징수에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보지도 않는 방송에 왜 내가 돈을 내야 하는가”이다. 이런 어려움은 영국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자율 납부 형태인 일본 NHK수신료 징수율은 70% 수준으로 격감했다. ‘인플레이션 억제’를 이유로 프랑스도 수신료를 폐지하려 한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이처럼 수신료 제도가 도마 위에 오를 수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물론 명분은 인터넷 디지털 시대에 공영방송 역할이 더 이상 의미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이면에는 정치권에서 볼 때 공영방송 위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자신감이 깔려있는 것이다. 이제 공영방송 눈치 볼 필요도 없고, 정치적 효용성도 크게 낮아졌다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정치권과 일부 언론들이 외국 사례들을 인용해가며 KBS 수신료 폐지 주장을 제기하는 것을 보면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이례적으로 이번에는 집권 여당에서 수신료 폐지를 강하게 들고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어떤 정파든지 집권 직후 바로 공영방송 경영권을 탈환하고 수신료 인상을 추진해왔다. 반대로 야당이 되면 이를 결사반대하는 정형화된 공식에서 벗어나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더구나 천신만고 끝에 집권한 여당이 이런 공식을 벗어나 수신료 폐지를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KBS 위상이 그만큼 약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거기에다 집권에는 성공했지만 지난 정권이 언론노조를 방패막이로 구축해놓은 공영방송 아성이 너무 견고해 탈환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점이 작용한 듯하다. 한마디로 수신료 폐지를 내놓아 경영진 퇴진을 압박해보자는 의도로 보인다. “이렇게 해도 안 나가면 수신료 없이 고생해봐라”는 식의 어쩌면 “못 먹는 감 찔러나 보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런 느낌을 받는 이유는 공영방송 수신료 제도를 손질하려는 나라들이 모두 반드시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 집권 여당의 수신료 폐지 주장은 “그냥 폐지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영국은 조세 형태로 인해 발생하는 개인 피해를 막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고, 프랑스는 부가가치세로 충당한다는 계획이다. 또 어떤 나라는 수신료 재원을 통신사업자에게 부담시키기도 하고 정부 기금을 활용하는 나라들도 있다. 심지어 노르웨이처럼 아예 조세로 전환해 공영성을 더욱 강화한 나라도 있다.

    한마디로 어떤 나라도 공영방송을 아예 없애버리자는 계획은 없다. 그러므로 실질적 대안 없이 수신료만 폐기하자는 주장은 결국 공영방송을 없애자는 주장을 에둘러 표현한 것일 뿐이다. 더구나 한국 방송정책 논의의 고질적 문제인 외국 사례 중에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발췌해 논거로 삼는 ‘쓰레기통 모델’이 다시 도지고 있는 느낌이다.

    물론 KBS를 비롯한 우리 공영방송이 정치적으로 독립되지도 않고 방만한 조직 이기주의식 경영으로 국민들의 큰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KBS와 구성원들의 뼈를 깎는 반성과 개선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고 어떤 대안도 없이 수신료 폐지를 압박하는 것은 심정적으로는 이해는 가지만 책임있는 집권 여당이 취할 태도는 절대 아니다.

    정말 공영방송을 계속 존속시킬 것인가부터 어떤 목표를 가지고 어떻게 운영하는 것이 21세기 디지털미디어 시대에 걸맞는가에 대한 진정성 있는 공론의 장이 필요한 이유다. 어쩌면 수신료 문제는 이 문제에 대한 합의에 도달한 후 논의되는 것이 순서에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