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책보고 정석 외웠는데, 정석 모르는 10급에게 100집 져"
  • ▲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와 더불어민주당 정세균 전 대표가 9일 서울 대학로에서 진행된 이세돌 9단과 구글 알파고 간의 대국 생중계 바둑콘서트장에서 빔프로젝트를 통해 중계되는 대국 관전에 몰입해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와 더불어민주당 정세균 전 대표가 9일 서울 대학로에서 진행된 이세돌 9단과 구글 알파고 간의 대국 생중계 바둑콘서트장에서 빔프로젝트를 통해 중계되는 대국 관전에 몰입해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세기의 대결'이라 불린 이세돌 9단과 구글 알파고(AlphaGo)의 대국에 정치인들이 잔뜩 몰렸다. 대체 왜 정치권은 이렇게 바둑을 애호하는지, 또 조훈현 국수(國手)의 새누리당 비례대표 출마를 앞두고 바둑과 정치 사이의 묘한 함수 관계는 어떠한지를 두고서도 새삼 관심이 쏠린다.

    9일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이 펼쳐진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에는 여야 정당의 주요 정치인들이 대거 모습을 드러냈다. 각 정당이 35일 앞으로 다가온 총선 준비와 공천 절차 진행에 경황이 없는데도, 바쁜 시간을 쪼개 총출동한 것이다.

    국회기우회장인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는 김용남 원내대변인과 함께 일찌감치 대국장을 찾았으며,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대위 대표와 박영선 비대위원,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등도 대국장의 헤드테이블을 장식했다.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는 대국 현장 대신 대학로에서 동시 생중계가 진행된 바둑콘서트장을 찾았다. 이 자리에는 더민주 정세균 전 대표도 자리를 같이 했다.

    ◆원유철 "상대 왕 잡아야 하는 체스와 달라… 상생하자"

    여야 주요 정치인들은 이날 펼쳐진 '세기의 대결'을 맞이해, 뼈가 있는 말들을 쏟아냈다.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는 "서양의 체스는 상대의 왕을 죽여야 끝나지만, 바둑은 상생하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며 "정치권에서도 바둑과 같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상생의 정치를 했으면 한다"는 뜻을 피력했다.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는 "대학교 2학년 때 바둑 책을 많이 구한 다음에 정석부터 외우고 열심히 공부했다"며 "그리고나서 실제로 바둑을 뒀는데 10급도 안 되는 친구에게 9점을 깔고 100집 넘게 졌다"고 회고했다.

    "이론과 실제가 전혀 다르구나"라며 "나는 외운 정석대로 뒀는데, 10급 안 되는 친구는 정석을 몰라 마음대로 두니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토로한 안철수 대표의 말에는, '정치는 민생을 위해 있고, 정당은 수권을 위해 존재한다'는 정석을 무시한 채 맘대로 폭주하는 '정치 하수' 문재인 전 대표를 비롯한 친노패권주의 세력에게 당했다는 뜻이 숨어 있다는 분석이다.

    ◆정세균 "안철수는 IT 전문가라 알파고 응원할 것" 하자 '화들짝'

    이날 총출동한 정치인들은 한목소리로 이세돌 9단을 응원한다는 뜻을 밝혔다.

    더민주 김종인 대표는 "이세돌 9단이 이기라고 응원하러 왔다"고 했고, 박원순 시장도 "세계적인 이벤트라 응원하러 왔다"고 거들었다.

    정세균 전 대표가 "우리 안철수 대표는 IT 전문가라 알파고를 응원하겠지만…"이라고 묻지도 않은 채 운을 떼자, 착석해 있던 안철수 대표가 화들짝 놀라 "아니다"라며 "나는 사람 대표인 이세돌 9단을 응원한다"고 항변하기도 했다.

    이렇듯 말의 성찬을 벌이던 정치인들은 막상 대국이 시작되자 숨죽인 채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한 수 한 수를 지켜봤다. 평소 앞에서 행사가 어떻게 진행되든 사회자나 연사가 무슨 말을 하든 신경쓰지 않고 자기들끼리의 귀엣말에 열중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신선 놀음에 도끼자루… "컷오프 확인할 생각 못해"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와 더민주 정세균 전 대표는 나란히 앉았음에도 대국이 시작되자 한 마디 사담도 나누지 않고, 조혜연 9단의 해설을 경청하는데 집중했다. 안철수 대표는 당초 예정한 시간을 훨씬 넘겨서까지 초반 우상귀에서 파생된 전투를 관전하다가, 미래학자의 강연 관계로 조혜연 9단이 해설을 중단하자 그제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비로소 정세균 전 대표에게 악수를 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바둑콘서트장을 나선 안철수 대표는 더민주 컷오프에 대한 논평을 요청하는 취재진의 질문에 "컷오프가 발표됐느냐"고 반문하며 "바둑을 보느라 확인할 생각도 못했다"고 답했다. 자리를 나설 때, 이세돌 9단은 알파고의 치받기에 이은 맞끊기로 인해 다소 어려운 형세에 몰려 있었는데, 최근의 당 상황과 관련해 동병상련을 느낀 듯 안철수 대표는 "(이세돌 9단이 불리한 형국을 타개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며 "(알파고가) 예상 외로 너무 잘 둬서 깜짝 놀랐다"는 말을 반복하기도 했다.

    대국 현장인 포시즌스호텔에 모인 주요 정치인들도 정치 현안 대신 바둑을 주제로 한 대화에 몰두했다.

    이세돌 9단이 첫 수를 화점 대신 최근 드문 경향인 소목에 착수하자, 원유철 원내대표는 "이세돌 9단의 스타일이 원래 저런가"라고 고개를 갸웃하며 "알파고가 화점을 좋아하니 일부러 화점을 피하려고 소목에 둔 것 같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바둑과 정쟁, 고도의 수읽기 필요하다는 공통점 있어

    그렇다면 정치인들은 왜 이렇게 바둑을 사랑하는 것일까. 정치권 관계자는 "바둑과 정치, 엄밀히 말하면 정쟁(政爭)은 닮은 구석이 많다"며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있고, 고도의 수읽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 정치인들의 구미를 당기는 것 같다"고 전했다.

    실제로 정치권에서 흔히 통용되는 용어는 많은 부분을 바둑 용어에서 차용하고 있다. 이 관계자는 "정치부에서 작성한 기사도 많은 부분을 바둑 용어를 차용하지 않느냐"며 "아마 바둑이 없었더라면 정치 기사 쓰기가 굉장히 어려웠을 것"이라고 슬몃 웃었다.

    예컨데 "국민의당의 원내교섭단체 구성이 '초읽기'에 들어갔다"라는 대목에서 '초읽기'는 제한시간을 전부 소진한 사람으로 하여금 일정 시간(주로 30초) 내에 착수할 것을 독촉하는 제도를 말한다. 정치권에서는 주로 어떠한 결과가 곧 나올 것이 시간 문제일 뿐 기정사실화됐을 때 사용한다.

    "더민주 김종인 대표가 호언장담한 친노패권주의 척결은 애초부터 '무리수'였다는 지적"이라는 대목에서 '무리수'도 바둑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통할 수 없는 강수(强手)를 무리하게 둬서, 오히려 불리함을 초래하거나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때 사용된다.

    "2월 임시국회의 종료에 따라 정국은 빠르게 총선 '국면'으로 전환될 것으로 보인다"에서 국면(局面)이라는 단어도 본래 바둑에서 대국(對局)의 상황을 설명하던 단어다. "비호남 지역의 판세는 역력히 국민의당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분석"이라는 문장에서 판세(版勢) 또한 바둑판의 형세를 가리키는 말이다.

    장고(長考)는 그 자체로 바둑 용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문재인 전 대표가 오랜 양산 칩거를 끝내고 총선 지원을 위해 정치 일선에 복귀하기로 한 것은 '장고 끝의 악수'라는 평"이라는 대목에서 '장고 끝의 악수'는 바둑계의 유명한 격언이다. 한 수를 두기 위해 오랜 생각을 거듭하다가 되레 생각이 너무 깊어지는 바람에 꼬여서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잘못된 수를 착점할 때를 가리키는 말이다.

    ◆수순과 포석, 바둑에서의 뜻은 전혀 다르지만 정치에서는

    "천정배 대표가 수도권 출마를 요구받게 된 것은 본인이 스스로 초래한 '자충수'"라는 해설에서 '자충수'라는 단어도 바둑 용어다. 어떠한 수를 두는 바람에 오히려 자기 돌의 움직임이 무거워지고 상대에 의해 잡히기 쉬워지게 되는 등, 자기 수가 자기 발목을 묶을 때 쓰는 단어다.

    국민의당 천정배 대표는 다른 광주 지역 현역 의원들을 겨냥해 연신 '물갈이'를 주장하다가, 정작 자기자신에게 서울·수도권 출마 요구가 제기되자 "호남 정치 복원을 위해 떠날 생각이 없다"고 일축해 "자기 지역구가 소중한 줄 알면 남의 지역구도 소중한 줄 알아야 한다"는 비아냥에 직면했다. 이 때 '자충수'라는 말만큼 이 상황을 단 하나의 단어로 명쾌하게 묘사할 길은 달리 없을 것이다.

    "새누리당 공천관리위원회가 친박계로 분류되는 김태환 의원을 컷오프한 것은 비박계를 학살하기 위한 '수순'이라는 주장"이라는 대목에서 수순(手順)도 바둑 용어다. 말그대로 '돌의 순서'를 뜻하며, 어떠한 수를 놓기 위해 반드시 차례상 먼저 놓아야 할 돌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된다.

    바둑 용어로는 전혀 뜻이 다르지만, 정치권에서 '수순'과 비슷한 용례로 사용되는 단어로는 '포석'이 있다. 예를 들어, 위의 문장은 "새누리당 공관위가 친박계 김태환 의원을 컷오프한 것은 비박계를 학살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주장"으로 바꿔써도 뜻이 통하는 데 무리가 없다.

    포석은 바둑의 단계 중의 하나로 초반기를 가리킨다. 한 판의 대국은 초반 포석~중반 전투~후반 끝내기를 거치게 된다. 따라서 바둑 용어로서 '수순'과 '포석'은 전혀 뜻이 다르지만, 정치권에서는 둘 다 '어떠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사전 단계 내지 정지 작업'의 뜻으로 널리 애용된다.

    "새누리당 윤상현 의원의 욕설 통화 사건은 수세에 몰렸던 비박계로서는 '꽃놀이패'"라는 문장에서 '꽃놀이패'는 정치권에 차용된 가장 대표적인 바둑 용어다. '꽃놀이패'란 바둑에서 서로가 번갈아가며 돌을 따내 승부를 다투는 패(覇)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어느 한 편은 지더라도 거의 손실이 없지만, 다른 편은 지면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 패싸움을 지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