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도 외면한 ‘國父’ 탄신 140년-해방 70주년-건국 67주년, 이제 우리가 나선다
  • ▲ 이승만 대통령이 29살 옥중에서 쓴 책 '독립정신' 가운데 일부분. ⓒ뉴데일리 DB
    ▲ 이승만 대통령이 29살 옥중에서 쓴 책 '독립정신' 가운데 일부분. ⓒ뉴데일리 DB

    “감옥에서 보낸 지루한 세월이 어느덧 7년째가 되었다. 소중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기 아까워 외국 친구들이 빌려준 책을 탐독하며 고통과 근심을 잊어버리고자 하기도 했다. 세상 형편이 돌아가는 것을 생각하면 울분이 치솟아….”


    111년 전 한성 감옥에 있던 스물아홉 살의 한 젊은이가 책을 쓰게 된 이유를 설명하며 꺼낸 말이다. 이 젊은이는 ‘사대주의’에 찌들어 자신을 박해하던 조선 왕조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44년 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건국한다. 우남 이승만 대통령의 이야기다.

    서거 50주기가 된 오늘날,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초대 대통령이었던 독재자” “민심에 무지했던 독재자” 등의 답을 한다. 재미있는 건 이런 대답을 하는 사람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이 쓴 책이나 연설문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독립정신’


    이승만 대통령의 저서로는 ‘독립정신’과 ‘Japan Inside Out’이 가장 유명하다. 앞서 소개한 책 머리말은 ‘독립정신’에 나온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정신’에서 나라를 빼앗긴 데 대한 책임은 사람마다 경중은 있으나 죄 없는 국민은 없다고 지적한다. 국민이 깨친 나라는 망할 수가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국민들에게 자유가 목숨처럼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바탕으로 ‘독립성’을 키우라고 호소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독립정신’에서 당시 ‘대한 국민들’에게 강조한 것은 크게 여섯 가지였다.

    첫째 통상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근본이다.
    둘째 신학문을 배워 경제적 이익을 외국인들에게 뺏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셋째 진실을 외교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넷째 국기를 존중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다섯째 공적인 의무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여섯째 자유를 자기 목숨처럼 여기며 남에게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들의 ‘계몽’이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대한제국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입헌군주제’에도 호감을 보였으나 조선왕조와 권도세가들의 무능함, 비열함, 부패함으로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탄되는 모습을 보고, 미국에서 박사 과정까지 마친 뒤에는 한국이 일어서는 길은 자유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공화정 체제와 자유시장경제를 키울 통상 밖에 없다고 되새긴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서 공부하며 깨달은 점은 스물아홉 살에 쓴 ‘독립정신’을 뒤집어엎는 것이 아니라, 그 주장을 더욱 현실적이고 세련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948년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독립지사 출신 제헌의원들, 헌법학자들과 함께 자신이 평생 주장했던 정신을 ‘제헌 헌법’에 녹여 넣는 데 성공한다. 대한민국의 기틀을 자유민주주의를 목표로 하는 공화정 체제, 통상을 중시하는 자유 시장경제 체제로 만들어 낸 것이다. 


    모든 것을 만들고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거인’


    학교 역사책은 이승만 대통령을 건국 이전에는 권력에 눈먼 정치인, 건국 후에는 6.25전쟁과 4.19 의거 앞에 ‘무력한 노인’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그는 ‘거인 지도자’였다.

    1945년 해방 이후인 10월 16일 서울에서는 이승만 박사 귀국 환영회가 열렸다. 당시 조병옥 박사는 美군정청장 하지 중장에게 “이승만 박사는 독립운동의 원훈(元勳)이시므로, 상석에 모셔야 한다”고 이틀 동안 설득, 이를 관철시키기도 했다. 조병옥 박사가 기억하는 이승만 박사 환영회 때의 모습이다.

  • ▲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그는 우리 역사상 최고의 '거인'이었다. ⓒ뉴데일리 DB
    ▲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그는 우리 역사상 최고의 '거인'이었다. ⓒ뉴데일리 DB



    “…이제 우리 한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태평양 전쟁에서 영웅적으로 용전분투한 역전용사 미군을 환영하는 이 마당에 우리는 40년간 우리 한민족을 착취하고 압박하던 이 백아전당(白亞殿堂) 앞에 우리의 자유 독립의 상징인 백발이 성성한 이승만 박사가 바로 이 자리에 나와 계십니다”하고 이승만을 소개하였더니 덜어선 회장의 수만은 청중들에게서 우레같은 박수소리와 함께 감격의 울음소리가 이곳저곳에서 퍼져 나왔다.

    박수소리가 끝나는 것을 기다려 나는 연설을 계속하였다.

    “이 백아전당은 희고 깨끗이 단장되어 있지만 그 속에서 일보던 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들은 우리 한민족을 어떻게 해야만 많이 착취하고 일본에 예속되도록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계획하고 집행한 저주받은 아성입니다.

    그러나 이 백아전당의 흰 것과는 달리 우리 민족의 자유 독립의 상징인 이승만 박사의 백발은 40여 년 간의 해외의 모진 풍상을 다 겪어가면서 검은 머리가 흰 머리가 되도록 오직 조국의 광복만을 위하여 투쟁한 인생의 산 역사를 말하는 백발의 기록이며 상징일 것입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뒤, 3.15 부정선거로 시위가 격화되던 4월 12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故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된 것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국무위원들을 향해 “어린 학생을 죽여 놓고 무슨 헛소리들이냐”고 일갈했다. 그리고 “해결책은 내가 그만 두는 것뿐”이라며 하야를 결심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다른 많은 학생들이 다쳤다는 것을 알게 된 뒤, 4월 25일 서울대 병원을 찾아 학생들을 위로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 장하다. 불의를 보고도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야.”


    서울대 병원을 찾아 4.19 혁명 과정에서 다친 학생들을 위로한 이승만 대통령은 곧 하야 성명을 발표한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만 중요할 뿐 권력에 눈이 먼 ‘자칭 측근들’이 반대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 ▲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뒤 국민들이 "만수무강 하소서"라는 벽보를 붙이고 있다. ⓒ뉴데일리 DB
    ▲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선언을 한 뒤 국민들이 "만수무강 하소서"라는 벽보를 붙이고 있다. ⓒ뉴데일리 DB

    독립운동을 할 때부터 ‘반공(反共)’을 모토로 삼아 자유민주주의체제와 시장경제체제로 나라를 세우고, 해방 후 일제에게 고통 받던 소작농들이 ‘진정한 해방’을 맞을 수 있도록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6.25전쟁이라는 사상초유의 위기 속에서 든든하게 지켜줄 최고의 동맹을 맺고, 국민들에게 몸소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무엇인지 보여준 사람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다.

    최초의 한국인 기자, 美명문대학에서 학사부터 박사까지 과정을 3년 만에 끝낸 천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려는 일제의 침략야욕을 몇 달 전에 책으로 낸 예언가, 당장 눈앞의 고통에 휘둘려 미군의 부추김을 받고 쿠데타를 벌이려던 군인들을 누르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정비한 정치가, 원자력의 미래를 알아보고 원자로를 건설한 대통령, 대한민국의 자원은 ‘인재(人才)’라는 것을 파악하고 2만여 명을 국비유학을 보낸 지도자. 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해낸 위대한 인물의 진면목은 그가 서거한 지 50년이 지난 뒤에야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무시당하고 외면 받았지만,
    세상을 용서한 ‘거인’과 그 가족들


    ‘거인’ 이승만 대통령은 1965년 7월 19일 밤 하와이의 한 요양원에서 서거했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이승만 대통령의 흔적을 지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난 23일 조선닷컴은 ‘이화장 안주인’ 조혜자 씨와의 인터뷰를 실었다. 조혜자 씨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이 서거한 뒤 프란체스카 여사는 무척 힘든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뒤 들어선 민주당 정권은 이화장의 집기를 모두 실어가 버렸고, 박정희 정부는 이화장 식구들의 생활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1969년 되돌려 받은 세간은 썩어 못쓰게 되거나 사라진 게 많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1960년대 언론들은 이화장에 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유족들이 마치 호화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도했었다고.

    1965년 이승만 대통령이 서거한 뒤 오스트리아의 친정으로 떠났던 프란체스카 여사는 1970년 전직 대통령 부인에 대한 법령이 생기면서 이화장에 와서 살았다고 한다.

    조혜자 씨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이 서거한 뒤 1970년까지 묘비가 없었다고 한다. 한국으로 돌아온 프란체스카 여사가 정부에 강력히 항의한 뒤에야 묘비가 세워졌다고. 역대 대통령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만 이승만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혜자 씨는 인터뷰에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근대화와 경제 발전도 건국의 터전 위에서 가능했다는 걸 알아야 했다”고 간단명료하게 평가했다. 그렇다고 ‘원(怨)’이 쌓인 것은 아니었다. 아니, 박정희 대통령의 ‘공(功)’을 인정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뒤 조혜자 씨와 이인수 박사는 신당동 집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위로하러 찾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조혜자 씨는 1975년 장기영 당시 한국일보 사장이 이승만 대통령 탄신 100주년을 맞아 프란체스카 여사와 인터뷰를 하면서, ‘아내로써 가장 기뻤을 때가 언제냐’고 물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40년 만에 공개하기도 했다. 당시 프란체스카 여사의 답은 이랬다고 한다.

    “절대로 남에게는 얘기하지 마라. 실은 대통령이 되고 나니 국고가 부족해 공무원 봉급을 다 줄 수 없다는 보고를 받았다. 네 아버님이 우선 말단 공무원부터 주라고 했다. 그렇게 몇 달 지나 본인의 월급봉투를 처음 갖고 왔을 때가 가장 기뻤다.”


    이승만 대통령과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세간의 음해세력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와 그 국민들에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깨끗하고 정의감에 찬 군인이었던
    박정희 장군


    현재 시중에 유통되는 자료만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이승만 대통령의 모든 ‘공(功)’을 폄훼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건 짧은 생각이다.

    조갑제 대표가 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얼마나 ‘콤플렉스’에 시달렸는지, 이를 이기기 위해 평생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그 ‘콤플렉스’는 바로 ‘가난’이었다.

    어려운 집안에서 막내로 태어나 누구의 도움도 없이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다가 다시 만주군이 된 박정희 대통령의 일생은 ‘가난’과의 싸움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만주군 장교로 근무하면서 탈영하려는 한국인들을 몰래 광복군으로 보내기도 했고,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한 뒤에는 中베이징으로 가서 광복군에 합류, 한국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으로 있기도 했다.

  • ▲ 1948년10월 육군 정보국에 근무할 당시 박정희(맨 왼쪽) ⓒ美라이프 공개사진
    ▲ 1948년10월 육군 정보국에 근무할 당시 박정희(맨 왼쪽) ⓒ美라이프 공개사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6.25전쟁 당시 어떤 일을 했는지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그를 기억했던 사람들은 ‘정의감에 불타던 박정희 장군’을 떠올렸다.

    1952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등 대미 정책에 불만을 품은 美정부는 한국군 장성 일부를 포섭해 쿠데타를 모의한다. 이때 박정희 대령은 ‘형님’이라 부르며 따르던 이용문 장군을 따라 이에 가담하기로 한다. 하지만 쿠데타는 미수로 그쳤다.

    故채명신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의 군수사령관 시절을 이야기해주기도 했다.

    故채명신 장군은 중령 시절이던 1950년대 전설적인 유격대인 ‘백골병단’을 이끌고 북괴군과 전투를 벌이다 9사단으로 발령받았다. 이때 선배였던 박정희 당시 9사단 참모장(대령)은 채명신 중령을 데리고 불고기집에 가서 고기를 먹이면서, 피묻은 후배의 점퍼와 자신의 점퍼를 바꿔 입고 다독였다. 이것이 채명신 장군과 박정희 대통령의 첫 만남이었다고 한다.

    故채명신 장군은 6.25전쟁이 끝난 뒤 1955년 충남 논산의 육군훈련소장으로 취임했다. 그런데 육군훈련소는 군내 비리 때문에 물자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고, 부유층 자제들은 입대조차 하지 않아 ‘거지 집합소’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이를 ‘진짜 군대’로 만든 사람이 故채명신 장군이었다.

    故채명신 장군은 “육군훈련소 사정을 선배였던 박정희 장군에게 말했더니 ‘상부에 항의할 것’이라며 부들부들 떨더라”고 이야기했다.

    실제 1960년 1월 부산에 있던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임한 박정희 소장은 거드름 피우며 미군이 공여한 물자나 빼돌리던 기존 장성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당시 부산 군수기지는 미군의 공여물자가 들어오는 곳으로 군수품을 빼돌리려는 군 관계자와 업자들이 모두 모이는 ‘복마전’이었다. 박정희 당시 사령관은 이를 원천차단 하겠다고 나섰다.

  • ▲ 박정희 대통령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되는 故이용문 장군과 박정희 당시 대령. ⓒ박정희 기념사업회 화면 캡쳐
    ▲ 박정희 대통령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되는 故이용문 장군과 박정희 당시 대령. ⓒ박정희 기념사업회 화면 캡쳐

    하지만 얼마 뒤 3.15 부정선거로 전국에서 4.19 혁명이 일어났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박정희 사령관은 부산계엄사무소장으로 임명됐다. 이때 박정희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1960년 4월 24일 부산 범어사에서 ‘4.19 희생자 합동위령제’ 때 박정희 사령관은 “이 나라에 진정한 민주주의 초석을 놓기 위하여 꽃다운 생명을 버린 젊은 학도들이여”로 시작해 “여러분들이 못다 이룬 소원은 기필코 우리들이 성취하겠습니다”로 끝나는 조사(弔辭)를 낭독, 4.19 혁명을 지지한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이승만 대통령의 ‘꿈’을 현실로 만든
    ‘조국 근대화의 영웅’


    1962년 5.16 혁명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행보는 우리 국민들이 모두 아는 대로다. 부정부패와 비리, 편법과 불법에 물든 대한민국 사회를 ‘계몽’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뛰었다.

    5.16 혁명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공권력 확립’을 위한 불량세력들의 척결이었다. 이어 한국 사회를 근대화하기 위해 다양한 법률을 재정비했다. ‘축첩제도’나 ‘소작농 제도’ 같은 구악이 실제로 사라진 것도 이때부터였다.

    야당과 학생들이 격렬히 반대했던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1968년의 경부고속도로 착공은 물론이고 수출중심 경제정책 수립, 국내 청년인력의 해외취업, 철강업, 석화산업, 중화학공업, 기계제조업, 무역업, 방위산업, 건설업 등의 기틀을 쌓아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도록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18년 집권에 대해 좌파 진영에서는 지금까지도 ‘군사독재’라고 비판하지만, 1972년 10월 유신이 국민투표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는다.

  • ▲ 이승만 대통령의 '꿈'은 박정희 대통령 시대를 거쳐 '현실'이 됐다. ⓒ뉴데일리 DB
    ▲ 이승만 대통령의 '꿈'은 박정희 대통령 시대를 거쳐 '현실'이 됐다. ⓒ뉴데일리 DB

    1960년대와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대한민국의 근대화, 산업화를 함께 해 온 ‘산업화 세대’는 그를 ‘영웅’이라고 부른다. 이들 ‘산업화 세대’와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똑같은 목표가 있었다. “이제는 가난을 벗어나자”는 것이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과 산업화 세대는 불가능해 보이던 목표를 달성했다. ‘가난’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일생을 되짚어 보면, 그가 국민들에게 제시한 비전과 달성해야 할 목표는 언제나 현실적이었고 단순명료했다. 그리고 “국민들이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국민과 정부가 함께 해야 할 일”을 항상 목표로 내놨다. 

    주의 깊게 봐야 할 점은 박정희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제시한 목표는 사실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제시했던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시장경제 체제’를 생활화하기 위한 ‘기반’을 닦는 작업이었다는 것이다.

    ‘자칭 민주화 세력’이 늘 자랑하는 한국 민주주의 실현은 ‘자칭 민주화 세력’이 이뤄낸 게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과 산업화 세대들이 만들어 낸 '토양' 덕분에 성공했다는 뜻이다. 


    뉴데일리,
    이승만 대통령 탄신 140주년
    -해방 70주년-건국 67주년 기념하다


    조혜자 씨와 인터뷰를 한 최보식 조선일보 선임기자의 지적처럼 올해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 탄신 140주년, 서거 50주기’를 맞는 해다. 해방 70주년이자 건국 67주년이 되는 해기도 하다.

    지금 한국 사회는 대한민국이 해방 이후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우뚝 선 것이 ‘자연스럽게’ 이뤄진 일처럼 생각한다. 정치인들은 해방 70주년에만 초점을 맞춰 ‘남북대화’를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일각에서는 아직도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화’만을 생각할 뿐 ‘나라의 뼈대를 만든’ 이승만 대통령을 가리켜서는 ‘독재자’라며 폄하한다. 일부 좌파 매체는 ‘백년전쟁’과 같은 왜곡된 사실을 유포하며 이승만 대통령을 ‘친일파’이자 ‘파렴치한’으로 둔갑시킨다. 과거 “이승만이 CIA로부터 비자금을 받았다”는 헛소문을 퍼뜨렸던 ‘찌라시’처럼.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아무도 ‘옳은 일’을 위해 나서지 않는다면 우리라도 나서야 한다.

    뉴데일리는 창간 1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이승만 대통령 탄신 140년이 되는 3월 26일 오후 3시,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 20층에서 [대한민국 67년 :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자유통일]이라는 주제로 특별 강연회를 연다.

    뉴데일리는 모토 ‘자유민주주의와 글로벌 시장경제의 파수꾼’에 따라 지난 10년 동안 온갖 폄하와 모욕을 당해도 싸움꾼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싸움의 대상은 스탈린-모택동전체주의 독재체제와 일제 군국주의를 ‘평양 스타일’로 바꾼 김가 전체주의, 종북-친북과 그에 추종하는 떼촛불세력, 그리고 엉터리를 진실인양 선전-선동하눈 '깡통진보'세력이었다..

    평양 김가 전체주의 세력 및 그 추종자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면 벌일수록, ‘자칭 좌파’라지만 실제로는 빈 깡통인 부화뇌동 세력들과 다툴수록,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에 대한 재평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싸움의 주제는 언제나 “親대한민국이냐 反대한민국이냐”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뉴데일리는 우남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알리기 위해 지난 49개월 간 ‘이승만 포럼’을 운영해 왔다. 이번 특별 세미나는 이런 ‘이승만 바로 알기’의 종합판이다.

    이번 특별강연회에는 문창극 전 국무총리 지명자(前중앙일보 주필)이 ‘우남의 나라 만들기’, 북한 주민들을 지옥에서 구출해내는 이 호 목사가 ‘우남의 건국정신’을, 한국 최고의 대기자 조갑제 조갑제 닷컴 대표가 ‘박정희의 나라 잘 살게 만들기’로, 당대 최고의 논객으로 일컬어지는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前조선일보 주필)이 ‘우남과 박정희를 넘어 자유통일로’를 주제로 강연을 펼친다.

    이승만 대통령의 며느리인 조혜자 씨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세상이 이승만 대통령을 비난할 때 프란체스카 여사가 했던, 중요한 말을 전했다.

    “당시 신문에 ‘이승만이 CIA 돈을 받았다’는 등 악의적 기사가 날 때마다, 어머님은 ‘걱정하지 마라. 우리 국민이 바보가 아니다. 언젠가 공로를 알아줄 것이고 역사에 제대로 기록될 것이다’라고 했다. 아직도 더 기다려야 될까.”


    뉴데일리가 해방 70주년-대한민국 건국 67주년, 이승만 대통령 탄신 140주년을 맞아 여는 [대한민국 67년: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자유통일]이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가 생전에 기대하던, “역사에 제대로 기록되는 일”의 시작이 되리라 감히 말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재평가 없이는 대한민국의 건국과 흥국(興國)을 제대로 평가하고, 장차 이 나라를 선진일류국가로 만들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 ▲ 이승만 대통령의 '꿈'은 박정희 대통령 시대를 거쳐 '현실'이 됐다. ⓒ뉴데일리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