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님 만나보자" 서울 광화문 광장에 1백만 신도 구름처럼 몰려교황, 세월호유족 만나 위로..자필편지 품 속에 간직 "기억하겠다"


  •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한 시복 미사가 16일 오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렸다. 미사 참여를 허락 받은 천주교 신자만 17만명. 기타 일반 시민까지 모두 합치면 1백만에 가까운 인파가 모여든 것으로 추산됐다. 인산인해라는 표현이 적당할 정도로 수많은 신자들이 광장 일대를 가득 메웠지만 당초 우려했던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무더운 날씨 탓에 일부 노약자가 탈진하는 일도 있었지만 크게 다친 사람도 없었다. 교구별로 도열한 천주교 신자들은 미리 약속한 동선대로 움직여 타인과의 마찰을 최소화했다. 행사가 마무리된 뒤 자신이 남긴 쓰레기를 자발적으로 수거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2002 한일월드컵 이후 최대 인파가 몰린 광화문광장은 한층 성숙한 시민의식을 엿볼 수 있는 자리였다. 이른 새벽부터 분주했던 시복식 미사 현장을 정리해봤다.



  • ◆ 윤지충 바오로 8대 후손, 교황과 만나

    16일 오전 7시부터 청소년 60여명을 포함한 500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서소문 성지에서 '영접 전 감사 기도'를 드리며 프란치스코 교황을 기다렸다. 이날 모인 신자들은 모두 서소문순교성지를 가꾸는 이들과 서소문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이들.

    교황방한위원회는 태어난 지 100일을 맞이한 영아부터 80대 노인까지 서소문 주변에서 생활하는 지역 주민들과 중구청 직원 및 서소문 성지 개발 관계자들을 초대했다. 특히 지난 27일간 '서소문 순교성지 27위 복자 탄생 감사기도' 봉헌을 서약한 이들도 초대 대상에 포함됐다.

    서소문 순교성지는 1800년대 조선왕조의 공식 처형장으로 쓰였던 곳. 이날 교황은 시복 미사 전 한국 최대 순교성지인 서소문 성지를 찾아 한국의 순교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의미있는 첫 걸음을 내딛였다.

    오전 8시 50분 교황이 탄 차(쏘울)가 모습을 드러냈다. 교황은 차에서 내려 화동 2명을 보고 환한 미소 지었다. 화동이 앞장서 제단 앞에 꽃바구니를 두고 퇴장한 뒤 교황은 순교자현양탑 앞에서 1분여 간 눈을 감고 기도를 바친 뒤 성호경을 그었다. 곧이어 뒤로 돌아 신자들에게 교황 강복(降福)을 전했다.

    강복 후 순교자 후손들과 가장 먼저 인사를 나눈 교황은 이어 중림동 약현본당 어린이, 어르신들과 손을 맞잡고 인사를 나눴다. 5분여간 일일이 악수하고 셀카에도 응해주며 인사를 나눈 교황은 인사를 끝내고 돌아서려다가 자신을 부르는 어린이의 목소리에 다시 돌아서 또 다른 이들과도 인사했다.

    윤지충 바오로의 8대 후손이라고 소개한 윤재석(74, 바오로)씨는 "개인적으로 일생에 없을 것 같은 영광이고 정말 축복받았다. 너무나도 편하시고 인자하신 분이다. 마치 할아버지를 다시 만난 것 같은 기분이다"라고 말했다.

    서소문 순교성지를 둘러본 교황은 9시 10분쯤 공원을 나와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시복식장으로 향했다.



  • ◆ 세월호 유족이 건넨 편지, 품 속에 간직

    교황은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부터 광화문 시복식장까지 직선대로를 오픈카를 타고 이동했다. 교황은 수시로 차량을 멈춰 세운 뒤 아이들의 머리를 매만지고 입을 맞추는 인자한 모습을 보였다.

    이동 중 교황은 34일째 단식 중인 단원고 고(故) 김유민 학생의 아버지 김영오씨와 만나 인사를 나눴다. 김씨는 교황에게 머리를 조아린 뒤 "세월호를 잊지 말아 달라. 특별법 제정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며 미리 준비한 편지를 직접 건넸다. 교황은 노란색 봉투에 담긴 편지를 옆의 수행원에게 건네지 않고 직접 품 안에 넣었다.

    김씨는 "교황의 왼쪽 가슴에 달린 노란 리본 배지를 바로 잡아 드리니 교황이 껄껄 웃으셨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날 김씨가 교황에게 전달한 편지에는 "세월호 유가족은 가장 가난하고 보잘 것 없으니 도와주시고 보살펴 주시고 기도해 주시고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도와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 ◆ 윤지충 바오로 등 순교자 124위 '복자' 추대

    약 40여 분간 시청과 광화문 일대를 오픈카를 타고 움직인 교황은 환호하는 시민들에게 일일이 손을 흔들고 환한 미소로 화답하는 모습을 보였다.

    카 퍼레이드를 마친 교황은 오전 10시부터 광화문 삼거리 북측광장에 설치된 제대에서 시복 미사를 집전했다.

    교황은 염수정 추기경, 교황청 국무원장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과 함께 죄를 반성하는 예식을 가진 뒤 곧바로 시복 예식에 들어갔다.

    교황은 안명옥 주교의 시복 청원을 받고 윤지충 바오로를 포함한 순교자 124위에 대한 시복을 선언했다.

    시복식은 성인의 전 단계인 '복자'를 선포하는 의식. 가톨릭에선 거룩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복자'로 선포한다. 이날 시복식에선 윤지충 바오로를 비롯해 1801년 신유박해 등으로 고초를 겪은 한국 천주교 순교자 124위가 복자로 추대됐다.

    보통 시복식은 교황청에서 열기기 때문에 교황이 직접 순교지를 찾아 시복 미사를 집전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로 평가된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과 교황청 국무원장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이 공동 집전한 시복 미사에는 국내외에서 1백명에 달하는 주교단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이날 미사는 안명옥 주교의 시복 청원과 124위 약전 낭독, 그리고 교황의 시복 선언, 강론, 영성체 예식 등으로 진행됐다.



  • ◆ 시복 미사 후 헬기타고 꽃동네로 이동

    교황은 강론에서 "순교자들의 승리, 곧 하느님 사랑의 힘에 대한 그들의 증언은 오늘날 한국 땅에서, 교회 안에서 계속 열매를 맺고 있다"면서 "복자 바오로와 그 동료들을 경축하는 것을 계기로 한국의 천주교인 여러분이 모두 하느님께서 이 땅에 이룩하신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며, 여러분의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신앙과 애덕의 유산을 보화로 잘 간직하여 지켜나가기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교황은 "한국 땅에 닿게 된 그리스도교 신앙은 선교사들이 아닌, 한민족의 마음을 통해 이 땅에 자발적으로 들어오게 됐다"며 천주교는 외세에서 강제로 유입된 것이 아닌, 자생적으로 꽃피워 온 종교임을 강조했다.

    교황은 "오늘은 모든 한국인에게 큰 기쁨의 날"이라면서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그 동료 순교자들이 신봉하고자 선택한 종교의 고귀한 원칙들에 대한 충실성은 한국인들에게 그 풍요로운 역사의 한 장이 됐고, 순교자들의 유산은 선의를 지닌 모든 형제자매들이 서로 화합해 일하도록 영감(靈感)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시복식을 무사히 마친 교황은 헬리콥터를 타고 충북 음성에 위치한 꽃동네로 이동해 약 2시간 반 동안 장애인들과의 만남, 한국 수도자들과의 만남, 한국 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대표들과의 만남 등을 가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