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디의 <고발>, 어둠을 가르는 한 줄기 빛
단편집 <고발>. 조갑제 닷컴 출판. 저자는 반디.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소속 작가라고 한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때 그는 알았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북한이란 곳이 온몸을 흔들어
“이건 아니야!”라고 외쳐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자료를 모았고, 그것을 엮어 소설을 썼다.
그 원고가 최근 탈북자의 손을 거쳐 서울에서 출간 되었다.
한국문학사상 특기할 사건이었다.
첫 번째 단편 ‘탈북기’의 주인공 ‘나’의 성분(成分)은 이른바 '적대군중'이다.
아버지가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로 몰려 처단된 집안이다.
북한사회에선 말하자면 ‘불가촉천민’인 셈이다.
그런데 그 아내의 출신성분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 내외는 사랑으로 맺어졌다.
어느 날 남편은 우연히 방구석에서 피임약을 발견한다.
아내가 피임약을? 아니, 아이 없는 집 아내가 왜 피임약을?
오라, 나 같은 ‘까마귀’ 자식을 낳지 않으려고! 그는 분노로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그에겐 더 큰 분노가 밀려왔다.
부문비서가 ‘나’ 몰래 아파트로 찾아와 아내를 만나고 가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부문비서는 아내를 탐했고, 아내는 남편의 입당(入黨)을 위해 부문비서의 환심을 사야만 했던 것. 그래서 그녀는 만약을 위해 피임약을 준비했고, 조카아이를 항상 곁에 불러다 두었던 것이다.
아내는 이 사실을 일기장에 꼼꼼히 적어놓았다가 분노한 남편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부둥켜 앉고 울다가 드디어 탈북을 결행했다.
마지막 단편 ‘빨간 버섯’ 역시 숙청 이야기다.
주인공은 기자 허윤모. 그의 취재대상 고인식에 관한 이야기다.
고인식은 친척이 월남(越南)한 사실을 고하지 않고 살다가 들켜버렸다.
그 길로 압록강 근처 산골마을로 강제이주를 당하고 된장공장 기술담당으로 쫓겨갔다.
된장생산은 이미 끊긴지 오래, 그런데도 허윤모 기자는 당의 지시로 “마침내 된장공장 복구”라는 기사를 작성해야만했다.
이 무렵 고인식은 산속 ‘원료기지’로 들어가 귀틀집에서 합숙을 하며 밭을 가꾸고
나물을 캐는 작업에 몰입하고 있었다. 완전히 뼈골 빠지는 최하계층의 인생이었다.
숙청된 자의 삶은 그런 것이었다. 그의 아내는 “하루빨리 당신이 이전 생활로 돌아가기를”이란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지 오래.
‘원료기지’ 합숙자들은 저 멀리 시내에 보이는 시당(市黨) 건물을,
먹으면 죽는 ‘빨간 버섯’이라고 불렀다. 건물이 빨간 벽돌로 지어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당이란 것을 빨간 독버섯처럼 사람 죽이는 장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신분사회 북한에서 최하계층이 던지는 원한의 절규인 셈이었다.
그렇게 묵묵히 일만 열심히 하던 고인식은 그러나 된장생산 부진의 책임을 그에게 떠넘긴
시당 간부들의 음모로 ‘직무태만’이란 죄목을 쓴 채 인민재판정에 끌려간다.
거기서 그는 소리친다. “저 빨간 버섯, 저 독버섯을 뽑아 버려랴, 이 땅에서, 아니, 지구 위에서
영영!” 기자 허윤모는 정신적 공황에 빠져 인민재판정 한 귀퉁이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독자인 우리가 말할 차례다.
저런 북한 현실을 두고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명박 시대를 "민주주의의 후퇴..." 그리고 박근혜 시대를 "유신의 부활..."이라고 하는
일부 지식인들부터 뭐라고 말 좀 해보았으면 한다.
"자본주의 남한의 소외된 민중의 고통에 동참한다"고 하는 이 땅의 참여문학은
이보다 훨씬 더한 고통의 땅 북한의 핍박받는 민중의 고통에 대해선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도
궁금하다.
반디의 단편집에 묘사된 북한은 '아우슈비츠+ 굴라그(소련 수용소군도)+조지 오웰의 1984년"의 총 합계다. 이거야말로 오늘의 지식인들이 “종은 누구를 위해 울리나?”라고 외치고 행동해야 할 반인도(反人道) 범죄의 극치 아닌가?
반디의 <고발>은 '이곳, 지금(here, now)'를 사는 지식인들의 양심의 검색대로 다가온다.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 전 조선일보 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