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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을 청년시절부터 지지한 미국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원한경).
미국 선교사들 가운데도 건국과정에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이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호러스 H.언더우드(원한경)였다.
미군정의 문교부장과 군정장관 자문으로 일했던 그는 대한민국이 4천년 이래 최초의 자유선거를 통해 탄생된 것을 높이 평가했다. 북한에 대해서는 소련의 꼭두각시로 비판했다.
미국의 감리교 교단과 북장로교 교단도 정식으로 대한민국의 탄생을 축하했다.
그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교회가 학교와 병원의 건설 등을 통해 어려움에 놓인 신생국을 도와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1948년 12월 1일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에서 열린 미 각 교파 해외선교부 연합회의에
보낸 메시지에서는 다가오는 겨울에 경제적 곤란을 겪게 될 한국인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지원을 호소했다.
그리고 북한이 남한을 공산화시키려고 위협하고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한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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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황제의 마지막 밀사였던 헐버트.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다는 그는 고종의 밀서를 들고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려 했으나 실패했다.(1905년)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의 독립운동과 건국을 도와 준 미국 선교사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1949년 7월에 호머 헐버트를 초청했다.
그러나 헐버튼 많은 나이에다가 무리한 여행으로 도착 즉시 건강이 악화되었다.
이승만은 청량리 위생병원으로 직접 병문안을 했다.
그가 사망하자 국장으로 장례식을 치르도록 했다.
또한 그는 아펜셀러 목사의 딸 앨리스가 죽었을 때는 사회장으로 치르도록 예우했다.
그리고 3.1운동 때 시위하던 숭실전문학교 학생들을 숨겨주었던 엘리 마우리, 제중원 원장과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지낸 올리버 애비슨 등 10여명의 선교사들에게는 태극훈장을 주었다.
그러나 모든 미국인 선교사들이 이승만에게 호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미군정 경제고문단장이었던 아서 번스, 그리고 미군정청 공보부 정치교육 담당책임자였던
J.어네스트 피셔는 이승만에게 비판적이었다. 그들은 이승만이 지나치게 반공적이라고 생각했다.
개신교와 민주주의의 관계
한국사회의 자유화에는 개신교(改新敎)의 역할이 컸다.
개인 구원을 강조하는 개신교의 종교적 개인주의 전통은 기질적으로 집단과 공동체를 강조하는 신분 사회를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1949년 11월 한국을 둘러보기 위해 온 미 감리교 선교본부 총무인 브럼보에게 이승만이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대한 모든 희망을 기독교 운동에 두고 있다고한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한 개신교의 자유주의적 성격은 집단화와 획일화를 강요하는 전체주의적인 공산주의 체제를 완강히 거부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개신교는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과 잘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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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총독부청사에서 열린 제헌국회 개회식. 초대 국회의장 이승만(왼쪽)은 이윤영 목사에게 감사기도를 올리게 한뒤 건국국회를 개회하였다.
그러한 개신교의 반공적(反共的) 성격은 북한으로부터 많은 개신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越南)함으로써 더욱더 강해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개신교는 6 · 25 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10월 ‘대한기독교구국회’를 조직하여
반공전선(反共前線)에 앞장섰던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러므로 이승만 대통령 12년 재임 기간에 개신교는 다른 종교들에 비해 영향력이 컸다.
한 가지 보기로 135명의 장관급 부서장들 가운데 개신교도가 47.7%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렇게 된 것은 이승만 대통령 자신이 개신교도이기도 했지만,
개신교도들 가운데는 일찍 개화하여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엘리트가 많았던 때문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승만 정부의 정책 가운데는 개신교에 우호적인 것이 적지 않았다.
감옥의 죄수들에게 선교활동을 허용한 형목(刑牧) 제도가 이미 6.25전쟁 전에 도입되었다.
또한 6.25전쟁 중에는 군대에서도 선교활동을 할 수 있게 한 군목(軍牧)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국영 라디오 방송인 중앙방송에서는 개신교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1955년에는 선교 라디오 방송인 기독교방송(CBS)과 극동방송의 설립이 허가되었다.
그에 따라 개신교 신도 수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난 1960년에 이르면
개신교도는 전체 인구의 거의 5%인 100만 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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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8년 군부대 '기지교회' 5주년 기념예배에 참석한 이승만대통령과 프란체스카여사. 뒷줄 가운데 김정렬 국방장관>
불교계에 대한 이승만의 태도
이승만이 개신교와 오랜 관계가 있다고 해서, 불교나 유교와 거리가 멀었던 것이 아니었다.
어릴 적에 그는 독실한 불교도인 어머니로부터 불교의 기초 교리를 배웠다. 그리고 생일에는 절에 가서 불공을 드렸다. 그가 어머니를 따라 다녔던 절은 오늘날 북한산 구기동 방면의 문수사와 옥수동의 미타사였다.
이승만은 82세이던 1957년에 직접 문수사까지 걸어 올라가 현판을 써주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되어서는 불교도들을 등용했는 데, 대표적인 경우가 사회부장관 전진한,
내무부 장관 백성욱, 문교부 장관 김법린이었다.
1949년 4월에 국회에서 농지개혁법 수정안이 통과되면서 불교계는 경제적으로 큰 위기를 맞았다. 농지의 자경,자영의 원칙에 따라 사찰들은 지금까지 소유해 왔던 농토를 내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뒤늦게 이러한 어려움을 알게 된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4월 21일 ‘사찰보호에 관한 건’이란 유시를 내려 대책을 강구하게 했다.
그리고 11월에 다시 유시를 내렸는데, 해법의 골자는 이미 농민들에게 분배된 농지를 다시 회수하여 원래의 소유주인 사찰에 되돌려 주어 승려들로 하여금 자경케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유시는 법률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농림부에서는 아무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1953년 5월 4일 이승만은 문안을 직접 작성하여 ‘사찰을 보호유지하자’는 담화문을 발표하고, 사찰 농지의 반환 방법까지 제시했다.
그리고 사찰을 세계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도록 하되, 그에 속한 토지는 국유물로해서 팔거나 양도하지 못하도록 했다.
대통령의 유시에 따라 농림부는 7월에 사찰자경농지사정요강을 각 도지사에게 발송했다.
그에 따라 사찰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은 포기각서를 쓰게 했다. 그 과정에서 포기를 거부하는 농민들이 있어서 경찰의 강제력이 사용되기도 했다.
그 결과, 1957년말에 오면 반환이 확인된 사찰 농지는 88퍼센트에 이르렀다.
그리고 반환되지 않은 사찰 농토는 문교재단 소유농지와 마찬가지로 2배로 보상받을 수 있게 되었다. 즉, 사찰은 농림부장관과 문교부장관이 발행하는 지가증권을 모두 받게 된 것이다.
또한 이승만은 불교계의 개편 문제에 대해서도 개입했다.
당시 불교계에는 일제시대 일본 불교의 영향을 받아 가족이 있는 대처승들이 우세했는데,
이승만은 한국의 전통적인 불교를 복원하기 위해 가족이 없는 비구승들을 내세우려 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1954년 5월의 “사찰을 보존하자”, 그리고 11월의 “왜식 종교관을 버려라”라는
유시를 통해 그러한 생각을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1954년 11월과 1955년 6월에는 강경한 어조로 대처승들이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이승만의 지원에 힘입어 비구승들은 점차 사찰들을 접수해 나갔다.
그에 따라 비구승과 대처승 사이에 사찰 확보를 위한 충돌이 계속되었다.
4.19로 이승만이 물러나자, 비구승은 다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1960년 11월 장면 정권 밑에서 대법원 판결은 대처승의 손을 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500여명의 비구승들이 법원에 진입하여 판결에 항의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유교에 대한 이승만의 태도
1875년에 태어난 이승만은 그 당시의 모든 한국인들처럼 유교문화와는 뗄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살았다. 특히 그는 어렷을 적부터 과거시험에 응시했기 때문에, 유교 경전을 통해 정신세계를 형성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대통령으로 재직하면서 삼강오륜을 강조하는 담화를 여러 차례 발표하고,
유도회 총재가 되어 1954년부터 성균관 대성전의 석전을 봉행했다.
그리하여 1958년에는 <대통령 이승만 박사 유교 담화집>이 나오게 된 것이다.
1954년 10월에 그는 담화를 통해 유교와 예수교에는 별로 모순이 없으며,
예의지국으로 이르는 데는 유교의 오륜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1957년 11월에도 그는 우리 나라가 예의지국이 된 것은 삼강오륜을 지켜온 덕택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와 같은 담화는 1958년 2월에도 발표되었다.
그리고 11월에는 베트남 방문에서 얻은 <명심보감>을 우리말로 만들어 어린이들이게 보급시키라고 최재유 문교부 장관에게 지시했다.
이와같은 유교에 대한 이승만의 태도는 유도회 내부의 갈등을 일으키게 했다.
왜냐하면 당시 유도회는 총본부 위원장과 성균관장의 직책은 이승만을 혹독하게 비판하던
김창숙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승만을 지지하는 이성주 일파와 김창숙 일파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게 될 것은 당연했다. 그것은 1956년 5.15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표면화되었다.
이성주 일파가 유도회 총회를 열자고 요구하자, 김창숙은 거절하고 고향으로 내려 갔다.
그러자 이성주 일파는 유도회선거추진위원회를 조직해 이승만 지지 선거 운동을 벌였다.
그리고는 유도회 위원장으로는 구자혁, 성균관장에는 최찬익이 새로 선임되었다.
그에 대해 김창숙 일파가 반발함으로써 유도회는 법정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계속)
<이주영 /건국이념보급회 이승만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