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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역 광장에 세워진 강우규 의사 동상. [사진: 보훈처 블로그]
<강우규> 의사는
1919년 9월 2일,
남대문 정거장(舊서울역 광장)에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조선총독 일행을 향해
폭탄을 던져 척살하려 했던 영웅이다.하지만 현재 청소년들이 보는 교과서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는 영웅이다.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왈우(曰遇) 강우규 의사 순국 93주기 추모식]을
오는 29일 오전 11시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강우규 의사 기념사업회(회장 강인섭)] 주관으로 연다고 밝혔다.<강우규> 의사는 1855년 평안남도 덕천에서 태어났다.
30살이 되던 1885년 함경남도 홍원으로 이사해
20여 년 동안 상업에 종사했다.<경술국치> 이듬해인 1910년 봄,
두만강을 건너 간도 두도구(頭道溝)로 거처를 옮긴 뒤,
북만주 일대와 러시아 연해주 등지를 돌다
1917년 북만주 길림성 요하현 신흥동에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 민족교육을 시작했다.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신흥동에서
한국인 수백 명을 규합해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이어 3월 26일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의
<노인동맹단(老人同盟團)>에 참가해
요하현 지부 책임자를 맡는 한편
새로 부임하는 조선총독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폭탄을 구입, <허형(許炯)>과 함께
원산을 거쳐 8월 5일 서울에 도착했다.<강우규> 의사는
서울 안국동 <김종호(金鍾鎬)>의 집에 기거하면서
신임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의
부임 정보와 사진을 입수한 뒤,
9월 2일 남대문 정거장(서울역)에 나가
마차를 타려는 총독 일행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이 의거로
일제경찰이 사망하는 등
3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지만
총독 암살에는 실패했다.이후 9월 17일 서울 종로구 누하동에서
친일경찰 <김태석(金泰錫)>에게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는다.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이때 일제 검사가 [감상이 어떠한가?] 묻자
<강우규> 의사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단두대상 유재춘풍 유신무국 기무감상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단두대 위에 홀로 서니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어도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28일 <강우규> 의사 추모식은
<안중현> 서울지방보훈청장, 광복회원, 평남도민회원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과보고, 기념사업회장 인사말, 내빈 추모사,
헌화․분향 등의 순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