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의 거장과 함께한 시간..[북한 인권 국제 영화제] 이장호 조직 위원장 특별인터뷰"北의 현실을 알리고, 인권 상황을 개선하는게 가장 큰 목표""봉준호, 인문적 소양 왕성하고 바른 친구" "강우석은 2% 아쉬워"
  • ▲ 이장호 감독  ⓒ 이미화 기자
    ▲ 이장호 감독 ⓒ 이미화 기자

     

    <북한 인권 국제 영화제> 개막식이 열리던 날,
    한국방송예술진흥원 연구실에서
    <뉴데일리> 취재진을 맞이한 이장호 감독은
    대뜸, 환한 미소와 함께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던졌다.

    사실 내가 탈북자의 원조야.

    함경남도 북청이 고향이라는
    이장호 감독은
    "태어나자마자 남한으로 내려와
    북한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아버지 세대 이전부터 줄곧 북쪽에서 기반을 닦아온 만큼
    (자신이) 탈북자의 원조격이나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고향이 그곳이다 보니 원래부터 북한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
    할아버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세대 2세대가 가고…,
    고향에 대한 기억이 없는 나만 남았는데
    내가 가고 나면 그나마 있던
    북한에 대한 기억들이 사라질 것만 같았지.

    나라가 두 쪽이 돼 가는 모양새가 점점 짙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어.

    사실상 [마지막 실향민] 세대인 자신마저 세상을 떠날 경우
    [남, 북이 정말 남남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이 감독은
    "3년 전, 한 인권단체에서 <북한 인권 국제 영화제>를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가뭄에 단비를 만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실제로 2011년 <북한민주화네트워크>를 주축으로
    <북한 인권 영상 제작지원 공모전>이 열리면서 시작된
    <북한 인권 국제 영화제>는
    1회 때부터 한국 영화계의 거장 이장호 감독을 [조직위원장]으로 위촉,
    현재까지 북한 동포의 인권 실태를 알리는 일에 앞장서 왔다.

    이 감독은
    "이제는 더 이상 북한 주민들의 인권이
    유린되는 상황을 지켜볼 수 없다"며
    "이번 영화제를 통해
    그들의 실상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이장호 감독은
    <별들의 고향>, <바보선언>, <바람 불어 좋은 날> 등
    20여 편의 작품을 연출하며
    영화계에 큰 획을 그은 [한국 영화史]의 산 증인.

    <뉴데일리>는
    <제 3회 북한 인권 국제 영화제> 개막식이 열린 지난달 24일
    서대문구 대현동에 위치한
    이 감독의 개인 연구실을 찾아가
    세번째로 북한 인권 영화제를 개최하게 된 소감과 향후 계획 등을 들어봤다.

     

  • ▲ 이장호 감독  ⓒ 이미화 기자
    ▲ 이장호 감독 ⓒ 이미화 기자

     

    북한 인권 영화제의 위원장을 맡으신 계기는?

    우선 탈북자란 말을 많이들 하는데,
    내가 탈북자의 원조라고 할까?
    고향이 함경남도 북청이란 곳인데,
    할아버지, 아버지의 고향이고 또 나의 고향이다.
    고향이 그곳이다 보니 원래부터 북한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세대 2세대가 가고,
    고향에 대한 기억이 없는 내가 남았는데
    나를 지나고 나면 그나마 있던
    북한에 대한 기억들이 사라질 것 같았다.

    나라가 두 쪽이 돼 가는 게 짙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가슴 아픈 것들이 있어서
    내가 마지막 세대라고 생각했을 때,
    이것을 내 후의 사람들에게 전해주지 않으면
    남, 북이 정말 남남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북한 인권영화제>란 것이
    영화계 내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고
    <북한 민주화 네트워크>에서 준비가 돼서
    영화 전문가가 없었다.

    그래서 나에게 의뢰가 왔고,
    나는 그런 안타까움이 있는 사람이니까 호응을 했다.
    그렇지만 이것을 맡고 나서 느끼는 서글픔이란
    정치권에서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나이든 사람들 이외에,
    젊은 사람들도 북한 인권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특히 2회를 <서울역>에서 진행한 적이 있는데
    노숙자들이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남한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데
    굳이 북한 사람들을 도와줘야 하겠냐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정말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하면 널리 확산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크게 남아있었다.

    그래서 영화제라는 방식을 사용하게 됐다.


    영화제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한다면?

    북한의 현실을 알리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극영화 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장르가 선정됐고,
    일반 시민들과 함께하는
    영화 축제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의 인권 상황을 개선하는데
    작으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 ▲ 이장호 감독  ⓒ 이미화 기자
    ▲ 이장호 감독 ⓒ 이미화 기자



    영화제를 운영 하시면서 아쉬운 점은?

    이번이 3회 째고, 아쉬운 점이 많다.
    제작지원을 했지만 그것을 완성하지 못한 프로그램(영화)이 있고,
    영화제를 운영하는데 있어서도
    우리 뜻대로 안 된다는 생각과

    또 그렇게 되려면 많은 예산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또 해외의 작품들도 받는 다면
    "좀 더 풍성해 질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다.

    그렇지만 비전문 프로그래머들에 의해서
    많은 작품이 확보된 것만 해도 감사하다고 생각한다.
    개선점으로는 주제는 좋은데
    작품성이 빈약한 작품들이 많아 아쉬웠다.

    좋은 영화가 모이는 것이 사실 영화제의 관건이다.
    4회 때는 전문 프로그래머라든지
    전문 인력이 투입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개인적으로는 혹독한 시련기였다. 내리막길이었다.
    87년도에 8편의 작품이 제작에 실패했고,
    집도 경매에 들어가고, 교통사고도 크게 나고...
    그런 시련기가 27년간 지속됐다.
    영화를 마지막으로 만든 것이 18년 전이다.
    하지만 이런 내리막길 속에서 몸과 마음의 상처라든지
    이런 것들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굉장히 중요한 숙제를 풀었다고 생각하고
    그 내리막길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정신적인 변화라든지 하는 것들이
    이번에 만든 <시선>이란 작품에 압축돼 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또 다른 데뷔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년이 칠십이고, 데뷔한지 40주년 되는 해인데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작업이 시작되는 시기라고 보고 있다.
    감회가 새롭다.
    1974년 데뷔 했을 때 같은
    설레는 마음으로 맞이하고 있다. 

    나 같은 경우 (영화라는)도박을 하는 심경 속에서
    예전에는 돈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조마조마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27년의 내리막길의 끝에서
    내 영화가 영화의 역사에 남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이 작품에 단 시일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고,
    또 일시에 관객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길게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게 더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은 영화를 만드는 데 까지 전력투구를 하지
    이후의 과정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 ▲ 이장호 감독  ⓒ 이미화 기자
    ▲ 이장호 감독 ⓒ 이미화 기자



    감독님이 생각하는 영화관?

    처음에는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던 감독이었다.
    28세에 데뷔를 했는데,
    영화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을 때였다.
    직업적이고 감각적이었다.
    그렇게 감독을 하다가 대마초 사건으로
    4년간 강제로 활동정지를 당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4년 동안 큰 변화를 맞게 됐다.
    영화를 못 만들면서 동료들의 영화를 보다가
    왜 한국영화가 현실을 그리지 못하고 있지?,
    왜 한국영화에는 리얼리즘이 없지? 하는 의문을 갖게 됐다.
    북한에게 우리의 현실을 보여줄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혹은 여러 정치적인 문제로
    영화를 통해 현실을 제대로 그릴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현실과 영화사이의 괴리가 발생하게 된 것이었다.
    그 시기에 비로소 영화에 대한 의식이 생기게 됐다.
    그래서 다시 활동할 수 있게 돼
    <바람 불어 좋은 날>이란 영화를 만들게 됐을 때,
    그때 농촌의 청년이 도시에 와서 적응하는 모습을 그려냈다.
    그 영화를 통해서 많은 젊은이들이 영화를 하겠다고 찾아왔다.
    그 사람들이 지금의 배창호, 박광수, 장선우, 신승수 등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영화가 산업화 되고
    대기업이 투자를 하기 시작하면서
    영화가 오직 돈을 위해 제작되는 경향이 생겼다.
    문제는 예전의 탄압받았던 시절과 비슷하게
    소비주의의 악영향이 영화에 들어가서
    또 다른 비현실을 그리고 있고
    다른 형태의 탄압이 됐다는 것이다.
    안타깝다.

    물론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난 영화의 희망을 오히려 저예산 독립영화에서 발견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네오 리얼리즘>이 그랬고
    프랑스의 <누벨바그>가 그랬으며
    미국의 <뉴 아메리칸 시네마>가 그랬다.


    후배 중 눈에 띄는 감독이 있다면?

    많다. 그 중에서도 사랑스럽고 아끼는 감독이 있다면,
    강우석과 봉준호를 들 수 있다.
    먼저 봉준호는

    인문적 소양이 왕성하고
    역사에 대한 인식도 관심이 많은 바른 친구다.

    산업 쪽에서는
    건강하게 잘 버티고 있는 게 강우석 감독인데

    일종의 흥행 때문에 자기 자신을 포기한 사람처럼 보인다.
    자기 영화의 예술성을
    흥행을 위해 기꺼이 버리고 있다.
    그게 아쉽고, 선배로서 안쓰럽다.

    두 감독이 눈에 띈다. 


  • ▲ 이장호 감독  ⓒ 이미화 기자
    ▲ 이장호 감독 ⓒ 이미화 기자



    얼마 전 작고하신 최인호 작가와의 친분, 에피소드가 있다면?

    초등학교 때부터 동기동창이다.
    아주 독특하고 천재였고, 앞서가는 친구였다.
    어릴 때부터 그 친구는 조숙했다.
    선병질적이고 내면이 외로운 아이였다.
    우리들이 아직 애일 때, 중학교 때,
    연애소설을 쓴 것을 보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그러다가 고등학생이 돼 사회와 부딪치면서
    과장된 적응, 과장된 방어를 하는 사람이 돼 있었다.
    두려울 때 개들이 짖듯이,..
    그는 인간관계가 두려우니까
    사람들과 만났을 때는 즐겁게 노는 것처럼 보이려
    과장된 행동을 하며 연기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실제 집에서 혼자 있을 때는 그런 행동들에 대해
    자기 모멸을 느끼면서 힘들어 했다.
    너무 예민하게 세상을 알고 있던 친구였다.


    인권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땅 안에 살고
    이전에는 같은 국민이었던 사람들이
    분단으로 인해 한 쪽은 풍요를 누리고,
    한 쪽은 인권이 유린되는 상황에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봐야한다.
    가난도 축복받은 가난이 있다.
    하지만 그쪽은 강제로 가난해진 상황에서
    저주받은 것 같은 생애를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남한하고 정말 관계가 없는 건지 생각을 해봐야한다.
    분명히 이것은 우리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가 풀어야할 숙제다.
    그런데 이 숙제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국민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반대의 입장으로 북한을 생각해보는 국민이 됐으면 좋겠다.

     

    [ 사진= 이미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