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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王家를 대표하여
文弱풍조를 없애지 못한 점을
동포들에게 사과하고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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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 李垠(이은)의 고백
趙甲濟
일본육사 56기 출신으로 한국군 군번 1번인 李亨根(육군참모총장 역임)은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1945년 8월15일 일본천황이 항복을 선언한 바로 그날 나는 일본 육군대위로서 도쿄에 있었는데 바로 영친왕 李垠(이은)을 찾아갔다. 조국이 없는 군인으로서 충성을 바칠 대상을 찾아 헤매던 나는 가끔 (고종의 아들인) 그 분을 찾았는데 그때마다 일본말을 쓰고 일본식으로 응대해주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날은 달랐다. 뜻밖에도 청산유수와 같은 유창한 우리 말로 열렬하게 충고하는 것이었다.
"조선과 일본은 다 같은 유교국가이면서도 일본은 尙武(상무)정신을 발전시켜 무사도를 전통으로 삼았는데 조선은 武를 천시하여 文弱(문약)에 빠지고 文尊 武卑(문존무비)라는 폐습을 이어오다가 결국은 武士를 존중하는 일본에 병탄 당하고 말았소. 나는 언젠가는 우리 조상들, 즉 조선王家(왕가)를 대표하여 文弱풍조를 없애지 못하여 亡國(망국)을 초래한 잘못을 우리 동포들 앞에 서 깊이 사과하고 싶었소.>
영친왕 李垠의 열변은 이형근 대위에 대한 당부로 끝났다.
"그러니 李대위는 급히 귀국해서 독립을 수호할 국군 창설에 힘써주 길 바라오. 처음부터 無에서 有를 창조할 각오가 단단해야 할 것이오."
이형근은 李垠의 이 고백이 '일생 잊지 못할 교훈'으로 남았다고 말 했다. 일본 육군포병대위이던 이형근은 일본에 있던 한국인 장병1천2백명을 데리고 1945년10월2일에 부산에 상륙하였다.
믿을 수 있는 군대를 갖고 있다는 것은 국가 위기 때 그 가치를 발휘한다. 建國의 礎石(초석), 호국의 干城(간성), 근대화의 견인차, 민주화의 울타리 役(역)을 맡았던 국군은 조국이 북핵과 종북을 제거하고 자유통일의 관문을 넘어 일류강대국 건설로 나아가는 길에서도 든든한 동반자가 될 것이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