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의 기습 남침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20분,
    잘 훈련되고 잘 무장된 20만명의 북한군이 일제히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침공해왔다.
    그것은 탱크, 중포,전투기로 잘 무장된 조직적인 침략이었다. 

       처음에 한국정부는 그것이 전면 침략인지 아니면, 흔히 38선에서 일어나던 국지 도발인지 확실하게 판단하지 못했다. 오전 9시나 돼서야 전면남침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승만에게 그날 새벽의 상황은 1939년 9월 1일 일요일 새벽 제2차 세계대전의 사작을 알리는 독일군의 폴란드 기습을 연상케했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폴란드의 그것보다 더 비참했다.  
    폴란드는 영국,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한국은 동맹국조차 없이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국가 멸망의 위기를 맞았던 것이다. 
     

  • 한국군은 병력이나 화력에 있어서 북한공산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한국군이 쏜 2.36인치 바주카포 포탄은 북한군 탱크에 맞아도 탁구공처럼 튕겨나갈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은 용감하게 잘 싸웠다.
휴가를 나왔던 병사들은 어김없이 부대로 돌아갈 정도로 애국심이 강했다.
 병사들은 탱크에 화염병을 던지면서 산화하는 육탄전을 벌였다. 
   그러나 국군은 사흘 만에 병력의 50%를 잃고 그 조직이 거의 완전히 무너졌다. 
   무초 대사는 급히 모든 수송 수단을 동원해 미국 국민들을 일본으로 피난시켰다. 
   그는 부녀자와 어린이들은 6월 26일 김포 비행장에 모이게 하여 수송기를 타게 했다.
그때 북한 전투기들이 달려들어 수송기를 호위하던 미군 전투기들과 공중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남자들은 인천항에 모이게 하여 서해를 지나가던 노르웨이 상선을 타게 했다.

   그러나 갓 태어나서 제대로 자리가 잡히지 않았던 한국 정부는 국군과 국민을 조직적으로 후퇴시킬 능력이 없었다.  남은 것은 항복뿐인 것 같았다.   

위기 상황의 대통령

   1950년 6월 25일 오전 9시에 북한의 전면 남침 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즉각 동경의 더글라스 맥아더 사령부에 전화를 했다. 그러나 일요일이라 잘 연결되지 않았다. 
   11시30분에 긴급 국무회의가 소집되었지만, 참석 못한 장관들이 많아 간담회로 끝내고 말았다. 당황한 신성모 국무총리 서리와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은 국군이 잘 하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는 의례적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정부는 시민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국군이 침략군을 몰아내고 있다는 상투적인 방송을 내보내는 도리밖에 없었다. 
  • ▲ 1950년 6월29일, 한국전선을 보기위해 급거 내한한 맥아더 장군.
    ▲ 1950년 6월29일, 한국전선을 보기위해 급거 내한한 맥아더 장군.
  •    이승만은 미국 정부와 동경의 맥아더 장군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그렇지만 주말이라 미국 정부와 연락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못했고,
     동경의 미군 사령부는 확실한 대답을 해 줄 형편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25일 밤을 꼬박 앉아서 새웠다.
    서울 하늘에는 소련제 전폭기 야크기가 떠서 기관총 공격을 하고 있었다.  
     
       전황이 계속 불리해져가자 측근들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피신을 강력히 권유했다.
     대통령이 적에게 포로가 되면 국가에 큰 피해를 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측근들의 강권에 못 이겨 이승만은 6월 27일 새벽 3시 30분경에 이르러서야 경무대를 나섰다. 그리고 새벽 4시에 특별열차로 서울역을 출발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전황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급히 피난에 나선 것을 후회했다.
    그래서 대구역에 도착한 지 20분만에 다시 기차의 방향을 북쪽으로 바꾸어 대전역으로 올라왔다.  
  • ▲ 북한군에게 점령되기 직전의 대전역 광장.
    ▲ 북한군에게 점령되기 직전의 대전역 광장.
  •    미군 참전 소식에 희망이 살아나다

       6월 27일 밤 대전의 충남도지사 관사에 머물던 이승만은 무초 미국 대사로부터 미군이 참전하기로 결정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감격한 이승만은 국민에게 그 소식을 빨리 알리기 위해 급히 서울중앙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녹음을 했다. 그리고 밤 10시부터 방송을 하게 했다.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28일 새벽 2시 30분경에 방송국이 북한군에 의해 점령당했기 때문에, 방송은 4시간 만에 중단됐다. 
       게다가 거의 같은 시간인 새벽 2시 28분에 한강 다리가 폭파되었기 때문에 방송은 오히려 서울 시민들의 피난에 방해가 되었을 뿐이었다.  
  • ▲ 6.25직후 부산항에 처음 도착한 미군병사들.
    ▲ 6.25직후 부산항에 처음 도착한 미군병사들.
  •    6월 28일이 되어서야 대전에서 겨우 임시국무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사흘 만인 7월 1일 새벽에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을 떠나, 다시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대구로 가려고 했으나 경부선에 공산 게릴라가 나타난다는 보고였다. 
       그 때문에 호남선으로 방향을 바꾸어 이리를 거쳐 목포로 갔다. 이때 대통령 일행은 프란체스카 여사와 수행원 세 명뿐이었다. 
       목포에서 해군 함정을 타고 7월 2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경황이 없는 상태에서도 대통령은 합장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부산에 몇 일간 머물던 대통령 일행은 7월 9일 다시 대구로 올라와 경북도지사 관사에 머물렀다.
     
    낙동강까지 밀리다  
     
       국군과 정부가 급속히 무너지고 있었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트루먼 대통령의 참전 결정이 예상보다 빨랐다는 사실이었다. 트루먼은 전쟁 사흘 째인 6월 27일에 일본에 있는 맥아더 장군에게 한국을 지원하라고 명령을 내릴 정도로 빨리 행동했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지 5년이 되어 군기가 해이해질 대로 해이해진 일본의 미군은 당장 한국으로 파견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그러므로 맥아더는 우선 한국전선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남침 닷새째인 6월 29일 그의 전용기 바탄 호를 타고 수원으로 날아왔다. 
       대전에 있던 이승만 대통령과 무초 대사도 맥아더 장군을 만나기 위해 수원으로 날아 가게 되었다. 
       두 대의 정찰기에 나누어 탄 이승만-무초 일행은 수원으로 가는 도중에 북한 야크 전투기의 공격을 받았다. 정찰기들은 계곡 사이로 요리조리 낮게 비행하면서 적기를 아슬아슬하게 따돌렸다.  
       수원 공군기지의 주기장에서 이승만과 맥아더는 극적으로 만났다.
     바로 그때 북한 전투기가 기습을 해왔지만, 두 사람은 무사했다. 
       적기가 사라진 뒤, 맥아더 장군이 보리밭을 밟고 서 있는 모습을 본 이 대통령은
     “장군, 어린 싹을 밟고 있습니다.”는 말로 곡식을 귀하게 여기는 한국인의 본능을 나타냈다. 

       회동이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과 무초 미국대사는 대전으로 돌아가고, 맥아더는 짚차로 한강 전선을 시찰했다.  
       흑석동 강뚝의 참호 속에 있는 한국군 병사를 보고 맥아더가 “귀관의 임무는 무엇인가”고 묻자, 그 병사는 “후퇴하라는 명령이 있기 까지 이 진지를 사수하는 것입니다.”고 대답했다.  
    맥아더는 그 병사의 말에서 한국군이 싸울 의지가 있음을 확인했다.  
       지상군 파견을 시급하게 생각했던 미군은 우선 7월 1일에 스미스 부대로 불리는 24사단 소속의 대대 규모 선발대를 부산에 상륙시켰다. 
     열차로 이동한 부대는 7월 3일에 경기도 오산의 죽미령 고개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미군은 잘 훈련되고 우수한 장비를 갖춘 북한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미군들은 훈련도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지형과 주민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한국군과 협조도 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북한군과의 첫 전투에서 미군은 500 여명 가운데서 거의 200 명의 희생을 냈다.

       그후 한국군과 미군은 밀리고 밀려 7월 20일에는 대전을 빼앗겼다.
    그 과정에서 24사단장인 딘 소장이 포로가 되는 일이 일어났다. 
  • ▲ 낙동강까지 밀린 한국군은 다부동전투에서 승리함으로 한국을 지킬 수 있었다. 사진은 다부동전투의 영웅 백선엽 장군, 1사단장때 모습.
    ▲ 낙동강까지 밀린 한국군은 다부동전투에서 승리함으로 한국을 지킬 수 있었다. 사진은 다부동전투의 영웅 백선엽 장군, 1사단장때 모습.
  •    8월 1일에는 낙동강 까지 밀렸다. 국군과 유엔군은 대구를 지키기 위해 그 유명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고, 그에 따라 그 방어선을 중심으로 해서 처절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한국군은 경북 칠곡군의 다부동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걷움으로써 대구를 지킬 수 있었다. 
       국군이 승리하는 데는 융단 폭격으로 불리는 미 공군의 대대적인 폭격이 효과를 걷우었다. 
       낙동강 서쪽에서는 미군이 마산을 지켜냈다.
    북한공산군은  전라남도로부터부터 동쪽으로 진격해 진주을 점령하고,
    거기서부터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마산으로 공격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이주영 [뉴데일리 건국이념보급회 이승만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