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온한 모습이었다.
결심이 굳은 사람에게만 흘러나오는 자신감이 가득한 표정.지난해 서울시장 재보선 당시 박원순 후보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안길 때도, 올해 9월19일 대선 출마 선언을 할 때도. 그리고 지난달 23일 사퇴 기자회견을 할 때도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조심스럽고 또 조심스러운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그래서 더더욱 안철수에게서 이런 표정을 본 적은 없었다.
“결심을 굳혔다.”
3일 안철수의 대선 캠프(진심캠프) 해단식에 참석한 안철수 교수를 바라본 민주통합당 한 중진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무슨 말일까?
당협위원장 시절까지 합하면 정치 경력만 20년 가까이 되는 이 중진 의원은 분명히 안철수를 보며 ‘두려움’을 보였다.
그리고 그의 표정에선 ‘기대감’도 함께 읽혔다.
안철수는 12월 19일을 미리 봤다. -
- ▲ 안철수 전 대선후보가 3일 서울 종로구 캠프에서 열린 해단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 안철수 기자회견, 무슨 의미?
지난달 23일 사퇴 기자회견을 한 안철수.
딱 열흘만에 다시 공식석상에 나왔다.새누리당은 모르는 척, 관심 없는 척. 그리고 민주당은 속이 바싹 타는 마음으로 안철수를 지켜봤다.
쟁점은 안철수가 얼마나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느냐!
하지만 안철수는 지난달 23일 기자회견 이상의 발언은 하지 않았다.
“지난 11월 23일 제 사퇴기자회견 때 ‘정권교체를 위해서 백의종군하겠습니다. 이제 단일후보인 문재인 후보를 성원해 달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저와 함께 새 정치와 정권교체의 희망을 만들어 오신 지지자 여러분들께서 이제 큰 마음으로 제 뜻을 받아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 안철수 기자회견 中
10여분간의 짤막한 기자 회견이었지만, 안철수는 ‘새 정치’는 5번을 언급했고, ‘문재인’은 단 한 번만 언급했다.안철수의 이 황금 비율이 말하는 것은 결국 ‘중립 선언’이었다.
박근혜와 문재인의 싸움에서 빠지겠다는 것.
다시 살펴보자.
선거법 문제도 있었지만, 안철수의 발언은 민주당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었다.
선거법상 문재인 캠프 운동원이 아닌 안철수는 문 후보에 대한 지지를 ‘호소’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 개인 지지 의사는 표명할 수 있다.
‘문 후보를 지지합니다. 나는 그를 동반자로 생각합니다’라는 식이다.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반대로 생각하면 애매했던 사퇴 기자회견의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함으로써, 문 후보에 대한 지지 의사는 드러냈다.
할 만큼은 했다는 이미지를 심어줬다.박근혜 캠프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이었고, 문재인 캠프에서는 ‘아쉬운’ 순간이었다.
박근혜-문재인 모두가 만족하는 ‘절충안’을 들고 나온 셈이다.
실제로 이날 민주당은 안철수의 지지에 감사를 전할 ‘명분’이 생겼고, 새누리당은 민주당이 아전인수를 하고 있다고 반박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이미 정치권에 진출에 마음을 굳힌 그에게는 새누리-민주당 모두 적으로 돌려서는 안된다는 ‘정치9단’의 ‘립(lip) 서비스’가 터지는 기자회견이었다.
결과는?
안철수는 두 사람 중 누가 대통령이 되던 독자적인 노선을 걸을 수 있는 입지를 굳혀 버렸다.
-
- ▲ 안철수 전 대선후보가 3일 서울 종로구 캠프에서 열린 해단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 안철수, 문재인에게 왜 그랬나?바로 드는 의문은 왜 안철수는 문재인을 ‘열렬히’ 지지하지 않았느냐는 점이다.
이유는 하나. 선거 결과를 미리 짐작했다는 얘기다.
안철수가 문 후보를 열렬히 지지했다면?
안철수 입장에서는 문 후보가 이겨야 한다.그가 팔 걷고 나섰는데도 ‘구태 세력’을 몰아내지 못했다면 안철수의 ‘힘’은 ‘새 정치’를 이룰 정도가 되지 않는다는 얘기가 된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은 하지 않는’ 안철수는 자신이 전면에 나서도 이길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이미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칫 등을 돌렸다가는 민주당이 대선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무너질 수도 있다.
2007년 대선처럼.단일화 과정에서 정당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실감했던 안철수에게는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 지지자들의 ‘머릿수’가 절실하다.
이날 그가 적당한 지지 ‘시늉’을 한 것에 대한 이유다.
▲ 그리고 또 하나
대선의 결과에 상관없이 현재의 민주당은 ‘붕괴’냐 ‘재편’이냐는 운명 앞에서 휘둘리고 있다.
한광옥 김경재 한화갑 등 민주당의 뿌리였던 DJ계열이 모두 빠져나가면서 주류 친노세력과 비주류 인사들의 대립각이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지고 있다.
대선 이후 벌어질 민주당의 ‘변혁’을 내다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정치에 대한 야심을 드러낸 안철수 입장에서는 어떤 의미에서는 새누리당보다 민주당이 더 눈엣가시로 다가올 수 있다.
이번 단일화 과정에서 적지 않게 느낀 실망감과 나름대로의 공포가 한몫했을 공산이 높다.때문에 안철수는 자신이 적당히 돕는 시늉만 보임으로써 민주당이 스스로 무너지는 ‘붕괴’를 바란 것으로 보인다.
만약 문 후보가 당선된다면, 민주당은 ‘재편’이라는 낮은 수준의 변혁으로 다시 명맥을 유지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럴 경우 안철수는 불리해진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정치 생명에 위협이 올 것을 알고 있다.결국 그는 이번 대선의 결과가 문재인의 패배로 나와야 자신이 살 수 있다는 ‘운명’을 직감했다는 말이다.
다만 지난달 사퇴 기자회견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입장을 내놓으며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겠다는 ‘속내’만 드러냈을 뿐이다.
-
- ▲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의 TV토론회 장면 ⓒ 캡쳐화면
◆ 새로운 시작, 안철수는 어디로?
안철수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새로운 시작’을 선언했다.
해단식이 아닌 출정식이었다는 분위기는 모든 정치 평론가들의 공통된 의견.“오늘의 헤어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국민들께서 만들어 주시고 여러분이 닦아주신 새 정치의 길 위에 저 안철수는 저 자신을 더욱 단련하여 항상 함께 할 것입니다.
어떠한 어려움도 여러분과 함께하려는 제 의지를 꺾지는 못할 것입니다.”
-안철수 기자회견 中
IT전문가답게 ‘윈도우 XP’의 로고 ‘새로운 시작’을 그대로 인용한 그는 이제 대선 이후를 바라보고 있다.다시 말하면 민주당이 언제 어떻게 붕괴되는가를.
이미 정치권은 안철수의 여의도 진입을 준비하고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선거법 위반 논란이 유난히도 많았던 19대 총선이었기에 첫 보궐선거가 열리는 내년 4월에 비는 국회의원 의석은 20석 안팎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식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미니 총선’이라 부를 만하다.
여기에 지자체장 자리까지 포함하면 결코 적지 않은 정치 무대가 열린다.현재 제 3당은 7석의 진보정의당.
지금까지의 안철수의 정치 내공과 인지도-지지도를 미뤄봤을 때 만약 내년 4월 재보궐에 맞춰 신당을 창당하고 몰아친다면 제3당을 차지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아 보인다.여기에 이미 무소속이 된 송호창 의원이나 민주당 내부 이탈 움직임까지 본다면 교섭단체(20석) 확보도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게 정치권의 우려 섞인 전망이다.
더 쉬운 방법은 대선 이후 패닉에 빠진 민주당을 그대로 먹어 삼키는 것.
뻐꾸기가 둥지를 강탈하듯이.남은 것은 민주당의 선택이다.
아니 안철수의 선택일지도 모른다.
관건은 민주당 내부의 ‘종북 세력’들.
안철수는 이미 문 후보와의 토론회 등에서 ‘종북 세력’에 대한 반감을 여실히 드러냈으며 대북정책에서 분명한 차이를 드러냈다.
종북세력을 축출하고 진정한 개혁 리버럴 정당 탄생을 유도하는 책임이 이제 안철수에게 일부 넘어갔다.
안철수의 이날 기자회견을 지켜봤던 민주당 한 중진 의원의 ‘두려움’과 ‘기대감’은 그런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