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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百濟 왕자의 후손
'오오우치 요시히로(大内義弘)' 임성태자(琳聖太子),
聖王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뒤 611년 일본으로 건너가
金泌材
일본 야마구치시(市)에 남아있는 오오우치 요시히로(大內義弘)의 동상과 루리코사(琉璃光寺) 5층탑
《조선왕조실록》에는 백제(百濟) 관련 기록이 총 284건 검색된다. 우연히 實錄에서 고대사 관련 자료를 찾던 도중 ‘정종(定宗) 2권 1년(1399년) 7월10일자 기록’에서 흥미로운 내용을 보게됐다. 제목은 <百濟의 後孫으로 일본 좌경대부(左京大夫) 육주목(六州牧)인 의홍(義弘)에게 본관(本貫)과 土田을 주는 일에 대한 의논>이었다.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일본 좌경대부(左京大夫) 육주목(六州牧) 의홍(義弘)이 구주(九州)를 쳐서 이기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치고, 또 그 공적을 말하였다. 임금이 의홍(義弘)에게 토전(土田)을 하사하고자 하다가,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 권근(權近)과 간관(諫官)의 의논으로 그만두었다.
의홍이 청하기를, “나는 백제의 후손입니다. 일본 나라 사람들이 나의 세계(世系)와 나의 성씨(姓氏)를 알지 못하니, 갖추 써서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고, 또 백제(百濟)의 토전(土田)을 청하였다.
임금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내려 그 가문의 세계를 상고하게 하니, 세대가 멀어서 징험할 수가 없었다. 잠정적으로 백제 시조(始祖) 온조(溫祚) 고씨(高氏)의 후손으로 하여 토전(土田) 3백 결(結)을 주기로 의논하니,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 권근(權近)이 도당(都堂)에 글을 보내어 말하였다...(중략)
급전사(給田司)에서 왕지(王旨)를 받들어 전라도 관찰사에게 이문(移文)하여 답험(踏驗)하게 하고, 그 문적(文籍)을 만들어서 영업전(永業田)에 충당하게 하였다. 사사(使司)에서 의홍의 사자인 중[僧]에게 토전을 준다는 일을 말하니, 중이 대답하기를, “만일 세계(世系)를 명시(明示)하여 주시면 전지를 주지 않더라도 또한 좋습니다.” 하니, 문하부(門下府) 낭사(郞舍) 등이 또 상언(上言)하였다.
“일본국 육주목 의홍에게 채지(采地)를 봉(封)해 주어서는 안된다고 소(疏)를 갖추어 아뢰었으나, 분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감히 미치고 어리석은 말로 다시 천총(天聰)을 더럽힙니다.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군자(君子)는 일을 하는 데 시초에 도모한다.’ 하였습니다. 대저 다른 사람과 교결(交結)하는 데에는 반드시 그 시초에 도모하여야 합니다. 처음에 도모하지 않으면, 후회가 뒤따라 이릅니다. 지금 의홍의 적을 토벌한 공으로 특별히 백제의 후손이라 일컫고 토전을 주면, 후세에 쟁란(爭亂)의 단서가 여기에서 시작될까 두렵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한결같이 전일의 계달한 바에 의하여 시초에서 삼가서 만세의 계책을 삼으소서. 만일 신 등이 오활하여 치도(治道)의 사체(事體)에 어둡다 하고 유음(兪音)을 내리지 않는다면, 비록 나중에 뉘우치더라도 그 후회[噬臍]는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교서감 승(校書監丞) 김시용(金時用)이 또한 성씨(姓氏)의 적(籍)과 토전을 주는 것이 옳지 않다는 뜻으로 상언(上言)하였다.》
일본어 웹사이트에 등장하는 백제 임성태자(琳聖太子)의 후손들.
위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면 定宗은 의홍(義弘)이 보낸 使者에게 族譜를 만들어 주었으나 땅(土田)을 하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되어 있다. 義弘의 일본식 발음은 요시히로(よしひろ)이다. 일본 웹사이트에서 同시대 左京大夫 의홍(義弘)을 검색해 보니 금방 결과가 나왔다.義弘의 원래 이름은 大内義弘(오오우치 요시히로, 1356년~1400년)이며, 大内弘世(오오우치 히로요)의 아들이었다. 요시히로의 父親 히로요는 일본 南北朝시대의 무장이자 다이묘(大名)였다. 오오우치 히로요에게는 義弘、満弘、盛見、弘茂 등 네 명의 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오오우치 가문은 14세기 일본의 주코쿠(中國) 지방에 위치한 야마구치(山口)에 자리를 잡고 200년간 이 지역을 통치했다.
오오우치 가문은 일본 서부 지역의 스오(周防), 나가토(長門), 토요타(豊田) 등 7개 지역을 지배했다. 이 지역은 현재 후쿠오카현, 시마네현, 와카야마현, 오사카의 일부지역을 아우르는 광대한 지역이다. 오오우치 가문은 대대로 中國과 朝鮮을 상대로 국제 무역을 독점해 부를 축적하는 등 일본 전역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었다고 한다.
일본어 ‘위키피디아’ 홈페이지에는 오오우치 가문의 원래 성이 타타라(多々良)였으며, 백제 聖王(《일본서기》에는 성명왕(聖明王) 또는 명왕(明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의 셋째 아들인 임성태자(琳聖太子)가 오오우치 가문의 조상이라고 되어 있었다. 琳聖太子가 일본으로 가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父親인 聖王이 가야 출신의 新羅 장군 김무력(金武力)에게 관산성 전투에서 죽음을 당하자 슬픔을 이기지 못해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되어 있었다.
琳聖太子가 일본으로 건너온 시기는 스이코(推古) 천황 19년(611년)이었다. 타타라(多々良)라는 성(姓)은 쇼토쿠(聖徳) 태자로부터 하사받은 것으로 나타났다.(원문: 15世紀後半に書かれた『大内多々良氏譜牒』によれば、琳聖太子は大内氏の祖とされ、推古天皇19年(611年)に百済から周防国多々良浜(山口県防府市)に上陸。聖徳太子から多々良姓とともに領地として大内県(おおうちあがた)を賜ったという。)
琳聖太子는 일본에 건너가면서 百濟의 유물인 칼, 피리, 관모를 가지고 갔다. 그가 가지고 간 칼의 경우 전통 日本刀와 달리 양날의 형태로 ‘은상감 기법’을 사용했다. 일본 학자들이 이 칼의 제작연도를 측정한 결과 7세기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분석되어 琳聖太子의 상륙시기와 맞아떨어진다. 琳聖太子 사후 타타라(多々良)씨는 12세기에 오오우치(大内)로 성씨(姓氏)를 바꾸었다.
오오우치 가문의 최후 당주(종손)는 오오우치 요시나가(大内義長, 1537년~1557년)이다. 요시나가는 오토모 소린(大友宗麟, 戰國時代 무장)의 형제이자 오우치 요시오키(大内義興)의 외손으로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 西일본 제일의 戦国大名) 사후 소린(宗麟)과 스에 다카후사(陶隆房)에 의해 이름뿐인 당주가 된 후, 1557년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에게 패해 자결했다. 31대 당주 오우치 요시나가를 끝으로 임성태자의 직계 후손은 모두 멸망했다.그러나 오오우치 가문의 방계(傍系)는 이후 오우치 요시타카의 다른 아들이 姓氏를 도요타(豊田)씨로 바꾸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외에도 도쿠가와 막부 시대 우시쿠번(牛久藩, 지금의 이바라키 縣)의 藩主였던 야마구치(山口) 씨도 오오우치 가문으로부터 분가한 大内義弘의 차남 오오우치 모치모리(大内持盛)의 후손이라고 한다.<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