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교조의 문화 전술
-
- ▲ 류근일 본사 고문ⓒ
오늘(10/2) 천안에서 있었던 자유교원노조 멤버들의 연찬회에 초청 강사로 갔다 왔다.
거기서 들은 바로는 전교조와 동조 그룹들이 근래엔 교조적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대중한테 첨예하게 드러내 보이기보다는, 예컨대 ‘행복 세상 만들기’ 하는 식의, 일종의 대중문화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변화하는 현실에 맞추어 전술적인 유연성을 발휘함으로써 보다 많은 대중(일반교사, 학부모, 학생 등)을 끌어들이려는 의도일 것이다.이 말을 전하는 L 교수는 그러면서 “무섭다”고 했다. 왜 무서운가?
그들이 폭넓은 대중성과 문화주의적 접근을 구사한다는 것은 그들의 세(勢)가 전보다 더 확대될 개연성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방법론적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은 그 반대쪽에 대해서는 분명 새로운 도전이기 때문이다.21세기는 대중문화를 한 아이템으로 하는 소프트 파워의 세기라 할 수 있다. K 팝이 전세계 청소년들을 매료시킬 수 있었듯이 말이다. 현실 세계의 정치경제적, 가치론적 갈등구조는 결코 소멸한 게 아니라 해도, 그것을 대하는 대중의 마음과 취향은 문화 코드로 표출되고 있다. 딱딱하지 않고, 닫혀 있지 않고, 권태롭지 않고, 심각하지 않고, 고착돼 있지 않고, 다분히 연예(演藝)적인 코드가 바로 그것이다.
19~20세기적인 사유(思惟)형식, 다시 말해 철학적, 사회과학적 사유는 갈수록 소수 지적(知的) 엘리트의 외로운 산채(山砦)처럼 고립되고 있다. 반면에 광범위한 대중적 감성 세대가 거리와 광장을 점령하고 있다. 이 추세에 밀려 19~20세기를 풍미 했던 구좌파의 도식적 이데올로기는 말라죽게 되었다. 유독 한반도에서만 철 지난 교조주의의 잔재가 시대착오의 막장을 장식하고 있었을 뿐이다.
전교조는 그 교조주의를 무기 삼아 지금까지 그 나름의 자체적인 응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반면에 그 교조주의로 인해 전교조가 갈수록 대중적인 호소력을 잃어간 점도 분명히 있었다. 전교조라 해서 이 자명한 사정을 언제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교조가 교조주의적 본질을 포기할리는 물론 없다. 이래서 나온 것이 전술적 유연성이었을 것이다.
대중은 항상 현혹당하기 쉽다. L 교수가 전교조의 전술적 유연성을 “무섭다"고 말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문제는 우파 역시 이 21세기 현상인 감성적, 문화주의적 접근방식에 익숙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익숙하지 않은 정도를 넘어 이 점에선 2000년대 좌파의 이른바 ‘문화제(文化祭)’란 이름의 각종 선전 선동물(物)과 봉기(蜂起) 이벤트에 비하면 그 역량이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다. 이래 가지고야 어떻게 문화전(文化戰, war of culture))에서 게임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일 정도다.
좌파는 ‘희망’ ‘평화’ ‘행복’ ‘축제’라는 말을 문화의 형식으로 무기화하고 있다. 사회과학 일변도, 논리주의 일변도를 탈피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파는? 모두가 한 번 깊이 고민해 봐야 할 문제다. 그나마 뮤지컬 ‘요덕수용소‘ ‘규원 혜원 구하기’ ‘통영의 딸 구하기’는 모처럼의 우파 쪽 문화전의 시도였던 셈이다. 북한주민 사이에는 한류(韓流)가 파고들고 있는데, 남한에서는 그 한류에 올라 탄 좌류(左流)만 판치고 있다? 너무나 역설적이다.
류근일 /본사고문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