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엇이 전두환(全斗煥)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나?  
     
    12.12 사건을 선악(善惡)이 아니라 역학(力學)의 관점에서 보면 더 재미 있다! 
    趙甲濟   
     
      전두환(全斗煥) 그룹이 국방장관과 대통령의 사전(事前) 재가 없이 당시 계엄사령관 정승화(鄭昇和) 대장을 불법적으로 연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군부의 유혈(流血) 사태인 1979년의 12.12 사건은 김영삼(金泳三) 정부 때 대법원이 확정판결한대로 ‘군사반란’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 전두환(全斗煥)측이 자신들의 행위를 법적으로 변호하는 것은 무리이다. 구(舊)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헌정(憲政)질서를 창출하는 혁명의 논리로 12.12 사건을 변호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들이 당시에 그런 혁명 선언을 하지 않았으므로 이 또한 불가능하다. 전두환(全斗煥) 그룹이 정승화(鄭昇和) 연행의 이유로 내세웠던 혐의들도 그들이 주도한 수사, 재판과정에서조차 증명되지 못하였다.
     
      12.12 사건 후 군부의 실세(實勢)가 된 全斗煥 그룹은 1980년 5.17 계엄확대 조치로써 정권까지 장악한 뒤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을 밀어내고 全 장군을 새 대통령으로 추대, 헌법을 개정하여 제5공화국을 출범시킨다. 5.17 계엄확대 조치 과정에서 신군부(新軍部)는 국회를 군 병력으로 봉쇄하여 ‘계엄해제 결의’를 못하게 하였다. 이는 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주권(主權)기관을 무력화시킨 명백한 쿠데타이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는 또 全斗煥의 경쟁자가 될 만한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김종필(金鍾泌)을 강제로 정계(政界)에서 배제하였다.
     
      全斗煥 그룹은 혁명이나 쿠데타를 선언하고 정권을 잡은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합법(合法)을 가장하였다.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은 그런 합법(合法)위장을 위하여 필요한 장치이고 도구였다. 최(崔) 대통령은 정승화(鄭昇和) 연행을 불법(不法)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사태가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사후(事後) 재가를 하였다. 그는 全斗煥 그룹이 군부를 앞세워 제기한 5.17 전국계엄확대조치, 정치인 숙청, 행정부를 무력화시킨 국보위 설치안도 재가(裁可)하여 형식적인 합법성을 부여하였다. 전두환(全斗煥) 그룹은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의 효용 가치가 없어지자 김정열(金貞烈)씨(全斗煥 시절에 총리 역임)를 통하여 사퇴를 권유하였다.
     
      10.26 사건 이후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 여론이 대세(大勢)였으므로 3김(金)씨가 단합하여 민주화를 약속한 崔圭夏 대통령 체제를 뒷받침하고 개헌(改憲)작업을 주도하면서 全斗煥 그룹의 등장에 대비하였더라면 신군부의 집권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김종필(金鍾泌)은 박정희(朴正熙)의 유신체제를 비판적으로 언급하면서 박정희 친위(親衛)세력인 신군부와 멀어졌다. 김영삼-김대중은 대권(大權)이 눈앞에 있다고 착각하여 서로 분열하였고, 김대중은 학생 및 재야(在野)와 손잡는 모습으로 군부를 자극하였다. 최규하(崔圭夏) 대통령까지 과도 정부 역할을 넘어서는 과욕(過慾)을 보이기도 하였다. 제2차 오일 쇼크로 경제난이 심화되는 가운데 정치불안과 사회불안이 동시에 덮치자 중산층의 민심(民心)은 민주화보다 안정을 더 우선(優先)하는 쪽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단결된 군부가 중산층과 분리된 민주화 운동 세력을 제거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전두환(全斗煥) 장군은 10.26 사건으로 발생한 권력의 진공(眞空)상태에서 정규육사 출신 장교단, 그 핵심인 하나회, 그리고 국군보안사령관이란 직책의 전면적인 뒷받침을 받음으로써 집권 드라이브를 걸 수 있었다. 全斗煥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었던 두 사람-정승화(鄭昇和)와 최규하(崔圭夏)는 10.26 사건 날의 애매한 행적과 행동으로 의혹과 불신을 샀고 전두환(全斗煥)은 이 약점을 십분 활용하였다.
     
      12.12 사건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정승화(鄭昇和) 연행이 계획대로 되지 않은 덕분으로 두 대통령이 생겼다는 점이다. 스무스하게 이뤄질 줄 알았던 연행(連行)작전이 전두환(全斗煥)측 공수부대가 총을 쏘면서 국방부와 육군본부와 수경사를 점거하는 군사변란으로 변질되면서 그날 밤 전두환은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넜던 것이다. 살기 위하여서라도 정권을 잡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스스로 만든 것이다. 인간은 살기 위하여 행동할 때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12.12 사건,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유혈(流血)사태를 거치면서 출범한 전두환(全斗煥) 정부는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재임(在任)기간 한국경제는 연평균 성장률이 10%를 넘어 세계 1등이었다. 물가(物價)도 잡고 무역흑자도 기록하였다. 이런 경제발전이 소란스런 민주화 운동에 완충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서울올림픽을 유치하고, 6.29 선언을 결단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였다. 그가 퇴임할 때의 대한민국은 그가 취임할 때의 대한민국보다 훨씬 민주화되어 있었고, 경제도 튼튼해졌다. 그는 독재자로 취임하였으나 퇴임할 때는 민주화에 기여한 지도자로 변해 있었다. 집권과정의 불법성(不法性)을 집권결과의 긍정성(肯定性)으로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는지가 늘 역사평가의 쟁점인데, 정치는 결과를 중시(重視)하는 영역이다.
     
      1995년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이 소급입법을 통하여 12.12 사건과 5.17 및 5.18 사건을 재수사하고 全斗煥 그룹을 법정에 세운 것은 역사가 해야 할 일을 정치(政治)가 대신한 셈이었다. 계엄사령관 직책에서 연행되어 보안사 수사관들로부터 물고문을 당하였던 정승화(鄭昇和)씨의 입장에선 속이 시원한 복수가 되었을 것이다. 이 역사재판은 한국의 보수층을 분열시켜 김대중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길을 열었다.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는 자세는 평가가 아니다. 평가는 쉽고 간단하다. 역사는 이야기여야 한다. 역사를 실록(實錄)으로 정확하게 구성해놓으면 평가는 저절로 된다. 전두환(全斗煥)이 옳았는가, 나빴는가의 논쟁보다는 왜 그가 집권할 수 있었느냐를 탐구하는 게 더 재미있고 유익할 것이다. 권력을 선악(善惡)의 관점에서 연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역학(力學)의 관점에서 들여다 볼 때 더 유익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역사를 이해하는 데 가장 큰 저해요인은 단순사고, 흑백(黑白)사고, 그리고 지나친 명분론이다. 역사는 복잡하므로 종합적 시각에서 이해하여야 할 대상이다.
     
      전두환이 역사를 만들었고, 그 역사는 전두환을 변화시켰다. 좋은 방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