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투표 원칙 무너져, 갈등만 더 키워”선관위는 오락가락...15일 이후 본격화 될 듯
  • “살다 살다 투표하지 말자는 얘기는 처음 들어보네. 어쩌라는 건지…”

    8일 오전 7시30분쯤 서울시 중구 덕수궁길. 바쁜 출근길을 재촉하던 회사원 전현준(36)씨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플래카드를 보며 말했다.

    “부자 아이 가난한 아이 편 가르는 나쁜 투표 거부하자. 투표율 33.3% 이하면 급식비 안냅니다.”

    오는 24일 예정된 서울시 세금급식 주민투표를 거부하자는 내용의 플래카드다. 주민투표를 보이콧하겠다는 민주당 서울시당이 걸어놓은 것이다.

    수해 복구와 여름휴가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서 세금급식 주민투표에 점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하지만 좌파 측에서 시작한 ‘주민투표 보이콧’ 운동에 주민들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지난 1년 내내 서울시청의 메인 이슈였던 세금급식에 대한 투표를 이제 와서 거부한다는 논리를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데다, 그동안 좌파 측에서 그토록 부르짖던 “투표로 심판하자”는 목소리와는 상반된 행태기 때문이다.

    전 씨는 “투표 불참 운동은 엄밀히 선거법 위반 아니냐”며 “주민 의견을 묻는 투표에 좋은 투표 나쁜 투표가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이미 뉴스를 통해 민주당의 의도는 알고 있는데 투표를 하지 말자는 말은 유권자들을 무시하는 태도로 보인다”고 했다.

  • ▲ 세금급식 주민투표 거부를 주장하는 플래카드 ⓒ 뉴데일리
    ▲ 세금급식 주민투표 거부를 주장하는 플래카드 ⓒ 뉴데일리

    ◇ 좌파, 사상 초유 투표 거부 운동… 왜?

    민주당 서울시당은 7일 서울시내 500여 동에 주민투표 불참을 독려하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일제히 내걸었다.

    플래카드 내용도 소득격차가 있는 강북과 강남지역이 다르다.

    강북 지역에는 ‘부자 아이 가난한 아이 편 가르는 나쁜 투표 거부하자. 투표율 33.3% 이하면 급식비 안냅니다’라는 문구를, 강남 지역에는 ‘182억 혈세 낭비 주민투표 중단하고, 수해복구 전념하라’라는 문구가 채택했다.

    강남의 경우 기습 폭우로 큰 피해를 당한 점을 겨냥해 이번 주민투표에 세금 182억이 소요된다는 점을 부각했다.

    강북은 “투표율이 33.3%가 넘으면 아이들 밥상이 날아가고, 투표 불참률이 66.7%가 넘으면 아이들 밥상이 지켜진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여기에 오프라인에서는 서울시 25개구에 1만부씩 배포할 총 25만부의 홍보물을 제작해 지하철 입구에서 출퇴근 시민에게 나눠줄 계획이다.

    이처럼 민주당을 포함한 좌파 진영이 투표 불참을 호소하는 데는 주민투표가 성사될 경우 승리할 확률이 희박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단계적 무상급식’을 주장하는 서울시는 주민투표 개표가 가능한 투표율 33.3%를 넘기면 지지표 과반수 득표는 무난할 것으로 보고 있다. 여당인 한나라당의 지원과 보수층의 조직력을 감안한 계산이다.

    좌파 진영도 내부적으로도 개표가 이뤄진다면 승리하기 어려울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서울시의회 한 민주당 시의원은 “투표 문구도 문제지만, 적극 투표층이 대부분 보수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실제로 투표율이 충족될 경우 4:6 정도로 서울시 주장에 동조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 ▲ 언제는 투표로 세상을 바꾸자더니… 지난해 6.2지방선거에서 투표를 촉구하는 좌파 시민단체 운동. ⓒ 자료사진
    ▲ 언제는 투표로 세상을 바꾸자더니… 지난해 6.2지방선거에서 투표를 촉구하는 좌파 시민단체 운동. ⓒ 자료사진

    ◇ 변질된 투표, 유권자 혼란만 가중

    좌파 진영의 주민투표 보이콧 운동에 유권자들의 혼란도 가중되고 있다.

    특히 투표장으로 향하는 것만으로 ‘단계적 무상급식’을 찬성하는 우파 성향으로 비춰질 수 있어 자칫 ‘공개 투표’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투표장을 가지 않으면 모두 좌파로 오해받을 수 있다.

    투표용지에 기표하는 것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도 전에 투표소에 나가느냐 안나가느냐 만으로도 대략적인 정치적 성향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게 되는 셈이다.

    성낙인 서울대 법대교수는 "정책 선택이 아니라 투표 참여여부가 이슈가 된 상황에서는 의사표시를 하는데 있어 자칫 공개 투표가 될 수 있다"며 "직접민주주의의 꽃인 주민투표의 본질을 훼손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성 교수는 "주민투표가 남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33.3% 투표율을 넘어서야 투표가 유효하도록 한 제한 규정이 예상치 못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며 "무엇보다 선관위의 공정한 투표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제는 공개 투표가 될 우려가 있다는데서 그치지 않는다.

    주민들의 혼란과 갈등을 고조시키는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있다.

    김일환 성균관대 교수는 "주민투표제는 민주주의의 범위를 확대하기 위해 시민이 확실히 직접 의사를 표시할 수 있는 경우를 만든 것"이라며 "그런데 이번 투표는 시민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투표를 해도 명확한 의지가 반영되기 어렵기 때문에 투표가 유의미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철 연세대 교수도 "많은 사람들이 이게 원래 주민투표의 취지와 목적에 맞는 경우인가 의심하고 있을 것"이라며 "원래는 투표를 독려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번엔 발의안 자체에 논란이 있었기 때문에 투표 참여ㆍ거부운동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아울러 주민투표가 본래 취지를 무색케 하고 있는 가운데 오는 투표일(24일) 이전까지 투표운동 기간 여야가 조직 동원 경쟁을 벌이며 주민들을 줄세우기 하면 무상급식에 대한 해법을 찾기보다 갈등만 깊어질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했다.

    이들은 주민투표제도 자체에 대한 정밀한 보완이 시급하다고 한목소리로 지적하기도 했다.

  • ▲ 서울시가 발표한 주민투표안 ⓒ 연합뉴스
    ▲ 서울시가 발표한 주민투표안 ⓒ 연합뉴스

    ◇ 난감한 선관위, 이러지도 저러지도…

    가장 큰 문제는 무엇보다도 엄정한 잣대를 들이대고 중립을 지켜야 할 선거관리위원회가 현재 상황에 가장 당혹스러워한다는 점이다.

    통상 선거에서 높은 투표율을 ‘미덕’으로 여겨왔던 선관위가 가장 기본적인 업무인 투표 안내 단계부터 양 진영의 눈치를 봐야 하는 초유의 상황을 맞았기 때문이다.

    중앙선관리위원회 관계자는 "투표운동이 참여 독려와 불참 거부로 굳어지면서 주민들의 정치적 성향이 드러날 수 있는 부작용을 우려하고 있다"면서 "미처 예견하지 못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현행법 안에서 공정한 투표관리에 주력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난감해 했다.

    게다가 사상 초유의 ‘투표 불참 운동’을 과연 공정한 투표 운동으로 봐야하느냐도 아직 결정하지 못한 상태다.

    서울시선관위 관계자는 "과거 어느 선거보다도 중립성 확보가 중요한 투표다"면서 "형식논리보다는 실질을 중시하겠다. 실제 유권자들이 부재자 신고일이나 투표일 등을 몰라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일은 없도록 하는 수준에서 홍보를 하겠다"고 설명했다.

  • ▲ '단계적 무상급식'을 주장하는 오세훈 서울시장과 '주민투표 보이콧'의 중심에 서있는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 연합뉴스
    ▲ '단계적 무상급식'을 주장하는 오세훈 서울시장과 '주민투표 보이콧'의 중심에 서있는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 연합뉴스

    ◇ 분수령은 광복절, 투표 직전 10일이 주효할 듯

    전문가들은 이번 주민투표의 최대 분수령을 광복절 전후로 보고 있다.

    여름휴가기간이 어느정도 마무리 되는 연휴 이후 본격적인 공론화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실제로 투표운동 양대 단체인 복지포퓰리즘추방국민운동본부와 나쁜투표거부시민운동본부는 거리유세 등 본격적인 운동을 아직 펼치지 않고 있다.

    우선 ‘단계적 무상급식안’을 지지하는 측의 실질적인 중심에 서 있는 서울시가 지난주 수해정국에 발목이 잡혀 투표운동 드라이브를 걸지 못한 게 원인이다.

    서울시가 주민투표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자 ‘투표 불참’을 주장하는 야권도 굳이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었다.

    야5당 간사를 맡은 민주당 김종욱 시의원은 "투표 명분이 없으니 그런 것 아니겠느냐"면서도 "지난주엔 수해복구라는 사안에 묻혀 있었다. 우리로선 아직 저쪽에서 강하게 나오지 않는데 적극적인 운동을 벌일 필요는 없다고 보고 있다"고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포퓰리즘추방본부 노재성 운영위원장도 "그런 점이 있는 건 사실이다"면서 "다만 서울시선거관리위원회가 적극적으로 주민투표 홍보를 하지 않는 게 더 큰 원인이다"고 말했다.

    따라서 두 단체는 투표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이기보다는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는 등 조직을 다지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나쁜투표거부운동은 시내 주요 거리에 ‘투표 거부’ 플래카드 300장을 내걸었지만 거리유세는 하지 않고 있다.

    지난주까지 21개 자치구에 지역운동본부를 출범한 이 단체는 현재 분위기가 지속하는 한 이번 주까지도 내부 결속을 다지는 쪽에 집중한다는 전략이다.

    포퓰리즘추방본부도 후원금 모금이나 거리유세 등에 참여할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서울시가 9일 부재자투표 신청 기간이 끝나는 것을 계기로 점차 주민투표 홍보 활동을 강화할 것으로 보여 속으로만 끓는 주민투표 열기가 폭발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서울시의회 민주당 김종욱 의원은 "이번 주까지 휴가철 아닌가. 빨라야 광복절 연휴가 끝나는 다음 주쯤 돼야 불이 붙을 것"이라며 "다만 신도 대다수가 보수성향이 있는 대형 교회가 언제 움직이느냐가 변수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