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지’ ‘정의’ 누가 마다하나

     한국 정치 담론의 지평에 ‘복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정의론’의 주창자 마이클 샌델 교수가 한국을 방문했다. 성장 이후에 복지와 정의가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무슨 수로 그 좋은 일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누가 복지와 정의를 싫다고 하겠는가만은...

     그렇다고 복지와 정의를 추구하지도 말자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무슨 수로 그럴 수 있느냐를 묻는 것뿐이다. 세금 왕창 걷어서 갈라 먹자? 어떤 종류인가의 사회주의적인 시책을 펴서? 공동체주의라는 것을 해서? 무상급식을 해서? 글쎄다. 말이 좋아 공동체주의지, 공동체 사회라는 것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짜자는 것인지 잘은 모르겠다.  


     하기야 국가재정(즉 국민 세금)을 잘 운영해서 사회적 약자들을 도와주자, 나눔의 미덕을 실천하자, 시장의 잔인성을 보완하자, 따듯한 사회를 만들자, 인간의 얼굴을 한 시장주의를 지향하자...하는 말들은 이미 오래 전에 나왔다. 그러나 결국은 윤리적인 구휼(救恤) 캠페인에 그친 감이 있었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지만. 그런 것들은 그러나 시장경제를 대치할 만한 ‘다른 체제’를 조직화 하는 정도로까지 구체화 된 바는 없다. 그냥 보조적인 정책과 대책을 실시해서 그 때 그 때의 복지수요에 부응하는 정도 아니었을까? 


     이런 정책과 대책을 펴서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 무력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책무다. 시장이 못하는 국가-시민사회만의 고유한 기능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장과 자유를 핵심가치로 하는 체제를 전면적으로 대치할 만한 모델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현실적으로는 없다.  

     시장을 폐지하거나 적대하는 체제도 있기는 하지만 다 복지와 정의의 정반대 쪽으로 전락했다. 북 유럽의 복지국가 모델도 한 때 굉장히 성가를 올리더니 요즘은 어째 한 물 간 것 같다. 이게 인간 세상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한계를 잘 헤아리고서 복지와 정의를 지향해야 나중에 썩 잘 안 되더라도 크게 환멸하지는 않을 것 같다. 완전주의를 지향한 교조주의는 복지도, 정의도, 자유도, 인권도 동시에 실현하지 못했다. 복지와 정의를 추구하되, 그 불완전성의 한계를 처음부터 인정하고서 경험주의적으로 하나씩 하나씩 정책적으로 보충해 나가는 편이 한결 나을 것 같다.  


     빈부격차를 줄이자? 참 기막히게 좋은 말이다. 모두가 중산층 되는 세상, 얼마나 신나는 말인가. 어떤 젊잖은 양반이 요즘 TV에 나와 “빈부격차를 줄이고.,..” 하며 성현(聖賢) 같은 말씀을 하시는 장면을 종종 보게 된다. 그래요? 어떻게요? 하향평준화 말고 말입니다...

     거듭 부연한다. 복지와 정의라는 이상적 가치 자체에 시비 거는 게 아님을. 다만, 쉽게 “야, 복지와 정의 왜 안 해?” “나처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터인데...”라는 식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뿐이다. 그보다는 “정치 지도층과 경제 자산층’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그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철저하게 구현하자" 고 말하는 편이 말하기가 한결 부담스럽지 않다. 

     정치인들의 복지 정견(政見)을 보면서, 그것이 제기되는 시대적인 흐름은 이해하면서도 그것이 자칫 또 하나의 포퓰리즘이나 세금만능주의로 흐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류근일 /본사고문, 언론인>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