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장 한사발 마시고 장작더미서 굴러도 안떨어져...나오면 아궁이에 던져 넣겠다고..."
  • 93년 전 民族의 운명을 바꿀 분이 태어났다! 

      어머니는 늦게 밴 태아를 지우려고 백방으로 애를 썼지만 1917년 11월14일, 이 세상을 보고 말았다. 

    趙甲濟   
     
     朴正熙(박정희) 바로 위의 누님 朴在熙(박재희: 1996년에 83세로 작고)는 1987년 10월6일, 서울시 서대문구 창천동의 2층 자택에서 기자에게 동생이 태어난 과정을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며느리 둘을 보신 어머님이 동생을 임신하셨을 때는 貴熙(귀희) 언니가 형부 殷龍杓(은용표) 씨와 결혼한 뒤였습니다. 언니는 정희가 태어나던 해에 딸을 낳았지요. 그러므로 마흔다섯에 임신한 어머니는 딸과 함께 아기를 밴 것을 퍽 부끄럽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때는 또 집안이 원체 가난하여 식구가 하나 더 느는 것이 큰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기를 지우려고 백방으로 애를 쓰셨습니다. 시골사람들이 흔히 쓰는 방식대로 간장을 한 사발이나 마시고 앓아누우시고, 밀기울을 끓여서 마셨다가 까무러치기도 했답니다. 섬돌에서 뛰어내려 보기도 하고, 장작더미 위에서 곤두박질쳐 보기도 했더랍니다. 아무리 해도 안 되니까 수양버들 강아지의 뿌리를 달여 마시고는 정신을 잃어버렸대요. 정신을 다시 차리고 보니 뱃속의 아기가 놀지 않더랍니다. ‘이제 됐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며칠 지나니까 또 놀더래요. 그 뒤 어머니는 일부러 디딜방아의 머리를 배에다 대고 뒤로 자빠져 버렸어요. 낙태를 시키려고 스스로 방아에 깔려버린 것이지요. 그때 나는 네 살이었는데 그 광경을 보고 어머니가 죽는다고 울고불고 했답니다. 어머니는 허리를 못 쓸 정도로 다치셨는데 뱃속 아기는 여전히 놀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할 수 없다. 아기가 태어나면 솜이불에 돌돌 싸서 아궁이에 던져버리리라’고 작심하고 아기 지우는 일을 포기했더랍니다.”
     
      박재희의 증언에 등장하는, 어머니와 같은 시기에 임신한 딸은 박정희의 큰누님 朴貴熙(박귀희·1974년에 작고)를 가리킨다. 박귀희의 아들 殷熙萬(은희만)이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이러했다.
     
      “한번은 내(귀희)가 친정에 다니러 갔는데 어머니께서 누구한테도 말을 못 하시겠다면서 임신한 사실을 나에게 털어놓으시는 거야. 어머니와 나는 뒷동산에 올라갔단다. 나는 어머니가 다치실 때를 대비하기 위하여 낮은 데 서 있었지. 어머니는 높은 데서 몇 번이나 뛰어내렸어. 한번은 내가 어머니를 부축하다가 함께 엉켜서 뒹굴기도 했단다. 정희가 태어나기 열흘 전에 나는 큰딸 鳳男(봉남·1995년에 작고)이를 낳았다.”
     
      다시 박정희의 누님 박재희의 추억은 계속된다.
     
      “동생 정희가 태어나던 날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그날 저는 혼자 마당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어머니 생각이 나서 ‘엄마야’하고 찾아봐도 안 보여요. 방문을 열어보니까 어머니는 이불을 덮어쓴 채 끙끙 앓고 계셨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또 아기 지우는 약을 먹고 그러시는 줄 알고 겁이 나서 아버지를 찾으러 논으로 뛰었습니다.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꽃신을 신고 달렸습니다. 돌밭에 넘어져 발등에서 피가 솟구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오 리는 뛰었을 거예요. 숨이 차서 헐떡거리니 나락을 베고 계시던 아버지가 보시고 얼른 논에서 나오시더니 대님을 풀어서 저의 상처를 동여맨 뒤 나를 업고서 집으로 오셨습니다.”
     
      태어날 수 없는 생명이 될 뻔한 아기가 세상의 빛을 본 것은 1917년 11월 14일(음력 9월 30일) 오전 11시경이었다.
     
      “삽작문을 들어서는데 울음소리가 들리더군요. 아버지와 함께 방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어머니는 혼자 아기를 씻어 옆에 뉘어 놓고 당신도 기진맥진해 있었습니다. 아기가 새빨갛고 꼬물꼬물 하던 것이 예쁘게 보였다고 기억이 납니다.”
     
      경상북도 善山郡(선산군) 龜尾面(구미면) 上毛里(상모리)의 金烏山(금오산) 자락 맨 끝에 자리한 허름한 초가집 삽작문에는 그 날 붉은 고추와 숯을 끼운 새끼줄이 내걸렸다. 박정희가 배냇생명을 마감하고 태어난 이후에도 난관은 이어졌다.
     
      “어머니는 젖꼭지가 말라붙어서 정희는 모유 맛을 모르고 자라났습니다. 밥물에 곶감을 넣어 끓인 멀건 죽 같은 것을 숟가락으로 떠먹였습니다. 그게 우유 대용이었지요. 변비가 생겨 혼이 난 적도 있었지요.”
     
      박재희의 이 말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들 은희만에게 한 박정희의 큰누님 박귀희의 生前(생전) 술회이다.
     
      “딸을 낳은 뒤에 産後(산후)조리를 하고 친정에 갔더니 정희가 태어났더구나. 어머니는 젖이 나오지 않아 내가 정희에게 젖을 물려주었단다. 시집에서 나와 낙동강을 배로 건너서 30분만 걸으면 친정에 도착할 수가 있어 나는 젖을 먹여주려고 자주 상모리에 갔었지.”
     
      다시 박재희의 증언.
     
      “정희가 두 살 때, 아직 기어 다닐 적인데 어머니가 정희를 큰형님(장남 東熙·동희의 아내)에게 맡겨 놓고 출타를 하셨어요. 형님은 바느질을 하고 계셨던 것 같은데 정희가 기어 다니다가 문지방 아래로 굴러 떨어졌어요. 그 아래로는 화로가 놓여 있었는데 정희는 벌건 화로에 처박히면서 한 바퀴 굴렀어요.
     
      시뻘건 숯을 온 몸에 뒤집어쓰고 말았지요. 머리카락과 눈썹이 다 탔어요. 형님과 나는 정희의 얼굴에서 숯을 털어내고 입 속에 들어간 숯을 끄집어내는 데 정신이 팔려 양쪽 저고리의 소매에 불이 붙어 타들어가는 것을 뒤늦게 알았어요. 저고리를 찢다시피 하여 불을 껐는데 양쪽 팔뚝에 심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아버지는 황토를 물에 짓이겨 상처에다 바르고는 베 조각으로 감아 놓았어요. 화기가 빠지고 한 달 만에 겨우 딱지가 앉았는데, 그때의 화상 흉터는 정희가 죽을 때까지 남아 있어 소매가 짧은 옷을 잘 입지 않았지요. 이 사건 뒤에 뽀얗던 정희가 까무잡잡하게 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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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 4월26일에 쓴 《나의 소년 시절》을 인용해 본다.
    맞춤법을 요사이 식으로 고치고 한자를 한글로 바꾸었을 뿐 원문 그대로 싣는다. 


    O   O   O    
      
      상모동이란 마을은 1910년대의 우리나라 농촌을 그대로 상징하는 가난한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는 선산 김씨 數戶(수호)가 그래도 부유한 편이었고 기타는 거의가 한량없이 가난한 사람들만이 90여 호가 6개 소부락群(군)으로 나뉘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다. 상모동에 와서는 약 1,600평 정도의 외가 衛土(위토)를 소작하면서 근근이 양식은 유지가 되고 형들이 성장하여 농사를 돕게 되니 생활은 약간씩 나아졌다. 아버지는 거의 가사에 무관심하고 출타하는 일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는 데 어머니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어려서 良家(양가)의 閨秀(규수)로 태어나서 출가 전까지는 고생이라고는 별로 모르고 자랐으나 출가 후는 계속된 고생 속에서도 우리 7형제를 남 못지않게 키우시느라고 모든 것을 바치셨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는 셋째 형 상희 씨를 구미보통학교에 입학시켜 공부를 시키셨다. 그 당시 이 마을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는 학생은 상희형 하나뿐이었다. 내 나이 9세가 되던 해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구미보통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때 형은 벌써 졸업을 했다. 이 때 우리 洞里(동리)에서는 (세 아이가) 보통학교에 입학을 했다. 다른 두 아이는 나보다도 나이가 몇 살 위이고 입학 전에 교회에 다니면서 新學(신학)을 약간 공부한 실력이 있다고 해서 처음부터 3학년에 입학을 하고 나는 1학년에 입학을 했다.
     
      상모동에서 구미읍까지는 약 8km. 시골서는 20리 길이라고 불렀다. (입학날은) 1926년 4월 1일이라고 기억한다. 오전에 네 시간 수업을 했으니까 학교수업 개시가 8시라고 기억한다. 20리 길을, 새벽에 일어나서 8시까지 지각하지 않고 시간에 닿기는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시간이 좀 늦다고 생각하면 구보로 20리 길을 거의 뛰어야 했다. 동리에 시계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시간을 알 도리가 없고 다만 가다가 매일 도중에서 만나는 우편배달부를 오늘은 여기서 만났으니 늦다, 빠르다 하고 짐작으로 판단한다. 또 하나는 경부선을 다니는 기차를 만나는 지점에 따라 시간의 빠르고 늦다는 것을 짐작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끔 기차 시간표가 변경되면 엉뚱한 착오를 낼 때도 있다.
     
      그러나 봄과 가을은 沿道(연도)의 풍경을 구경하면서 상쾌한 마음으로 학교에 다니는 것이 기쁘기만 했다. 여름과 겨울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여름에 비가 오면 책가방을 허리에 동여매고 삿갓을 쓰고 간다. 아랫도리 바지는 둥둥 걷어 올려야 한다. 학교에 가면 책보의 책이 거의 비에 젖어 있다. 겨울에는 솜바지저고리에 솜버선을 신고 두루마기를 입고 목도리와 귀걸이를 하고 눈만 빠꼼하게 내놓고 간다. 땅바닥이 얼어서 빙판이 되면 열두 번도 더 넘어진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면 앞을 볼 수가 없다. 시골 논두렁길은 눈이 많이 오고 눈보라가 치면 길을 분간할 수가 없게 되기도 한다. 사곡동 뒤 솔밭길은 나무가 우거지고 가끔 늑대가 나온다 해서 혼자는 다니지를 못했다. 어느 눈보라가 치는 아침에 이곳을 지나다가 눈 위에서 늑대 두 마리가 서로 희롱하는 것을 보고 겁을 집어먹고 마을 아이 셋이 집으로 되돌아오고 학교에 가지 못했다. 그 이후에도 그곳을 지날 때는 언제든지 늑대가 나오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눈이 똥그랗게 되어서 서로 아무 말도 않고 앞만 보고 빨리빨리 지나가곤 했다. 그런데 이 솔밭이 해방 후에 고향에 돌아와 보니 나무 한 그루 없이 싹 벌목을 해서 뻘건 벌거숭이 산이 되어 있었다.
     
      학교 다니는 나보다도 더 고생을 하는 분이 어머니다. 시계도 없이 새벽 창살을 보시고 일어나서 새벽밥을 짓고 도시락을 싸고 다음에 나를 깨우신다. 겨울에 추울 때는 세숫대야에 더운 물을 방안에까지 들고 와서 아직 잠도 덜 깬 나를 세수를 시켜주시고 밥을 먹여주신다. 눈도 덜 떨어졌는데 밥이 먹힐 리 없다. 밥을 먹지 않는다고 어머니한테서 꾸지람을 여러 번 들었다. 아침밥을 먹고 있으면 같은 동네의 꼬마 친구들이 삽작 곁에 와서 가자고 부른다. 어머니는 그 애들을 방안으로 불러들여 구들목에 앉히고 손발을 녹이도록 권하신다. 밥을 먹고 채비를 차리고 나면 셋이 같이 새벽길을 떠난다. 아직 이웃집에서는 사람들이 일어나지도 않은 새벽길을, 얼어붙은 시골길을 미끄러지면서 뛰어간다.
     
      망태고 밭두렁 길을 뛰어가다가 뒤를 돌아보면 청녕둑(집 앞에 있는 산 이름) 소나무 사이에 우리들을 보내놓고 애처로워서 지켜보고 서 계시는 어머니의 흰 옷 입은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도 어머니께서는 늘 그 장소에 나와 계시거나 더 늦을 때는 동네 어귀 훨씬 밖에까지 형님들과 같이 나오셔서 “정희 오느냐,” “정희야”하고 부르시면 “여기 가요”하고 대답하면서 집으로 돌아간다.
     
      “왜 좀 일찍 오지 이렇게 늦느냐” 하며 걱정을 하시면서 어머니는 자기가 두르고 온 목도리를 나에게 또 둘러주신다. 뛰어왔기 때문에 땀이 나서 춥지도 않은데 어머니가 자꾸만 목에다 둘러주시는 것이 귀찮게 여겨질 때도 있었다. 집에 돌아가면 구들목 이불 밑에 나의 밥그릇을 따뜻하게 넣어두었다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어머니는 상머리에 앉아서 지켜보신다. 신고 온 버선을 벗어보면 흙투성이다. 어머니는 밤에 버선을 빨아서 구들목 이불 밑에 넣어서 말린다. 내일 아침에 또 신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얼었다가 저녁을 먹고 온돌방에 앉으면 갑자기 졸음이 오기 시작한다. 숙제를 하다가 그대로 엎드려 잠이 들어버린다. 어머니가 억지로 나를 깨워서 소변을 보게 하고 옷을 벗겨서 그대로 재우면 곤드레가 되어 떨어져 자 버린다. 나의 나이 9세에서 15세까지 6년 동안을 이렇게 지냈다.
      학교에 가지고 간 도시락이 겨울에는 얼어서 찬밥을 먹으면 나는 흔히 체해서 가끔은 음식을 토하기도 하고 체하면 때로는 아침밥을 먹지 않고 가기도 했다. 이럴 때는 하루 종일 어머니는 걱정을 하신다. 그러나 그 당시 시골에는 소화제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며칠 동안 밥을 먹지 못하면 이웃집의 침장이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거기에 가서 침을 맞았다. 이상하게도 그 침을 맞으면 체증이 낫는 것 같았다. 나의 왼손 엄지손가락 뿌리에는 지금도 침을 맞은 자국이 남아서 빨갛게 반점이 남아 있다. 이 반점을 보면 지금도 어머니 생각과 이웃집 침장이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한없이 평화스럽지만 가난한 나의 고향, 가끔 학교에 가져가야 할 용돈이 필요하면 어머니가 한푼 두푼 모아두신 1전짜리 동전, 5전 10전짜리 주화를 궤짝 구석에서 찾아내어 나에게 주신다. 한 달에 월사금(수업료)이 그 당시 돈으로 60전이었다. 매월 이것을 납부하는 것이 농촌에서는 큰 부담이었다. 특히 우리 집 형편으로서는 큰 부담이었다. 어머니께서는 한 푼이라도 생기면 나의 학비를 위해서 모아 두신다. 때로는 쌀을 몇 되씩 팔아서 모아 두신다. 계란 1개가 1전이었다고 기억이 난다. 형들이 달라면 없다 하시고 알뜰히 알뜰히 모아두신다. 어머니는 담배를 좋아하셨다. 때로 담배가 떨어져도 나의 학비를 위해 모아두신 돈은 쓰실 생각을 아예 안 하신다.
      때로는 학교에 가져가야 할 돈이 없으면 계란을 몇 개 떨어진 양말짝에 싸서 주신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학교 앞 문방구점에 가면 일본인 상점 주인이 계란을 이리 저리 흔들어 보고 상한 것 같지 않으면 1개 1전씩 쳐서 연필이나 공책(노트)과 교환하여 준다. 이 계란을 들고 가다가 비 오는 날이나 얼어서 빙판이 된 날 같은 때는 미끄러져 넘어지면 계란이 팍삭 깨어져 버린다. 이런 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언짢다.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말씀드리면 계란을 깨었다는 꾸지람은 한 번도 하시는 법이 없다. “딱하지. 넘어져서 다치지나 않았느냐”고 하실 뿐이다.  
      
      [해설: 구미보통학교 1, 2학년과 5, 6학년 때 우등상을 받았던 박정희가 질병으로 결석한 일수는 1학년 때 18일, 2학년 때 20일, 3학년 때 16일이었다. 4학년 이후에 건강상태는 좋아져 5학년 때 하루, 6학년 때 사흘을 결석했을 뿐이다. 구미공립보통학교 6학년 때인 1931년 박정희 소년의 키는 135.8cm, 몸무게는 30kg, 가슴둘레 66.5cm로 발육상태 평가는 丙(병)이었다. 박정희 소년은 3학년 때부터 급장을 했다. 작은 체구의 박정희는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땅따먹기 놀이를 자주 했다고 한다. 작은 조약돌을 손가락으로 튕기고 뼘을 크게 벌려 영토를 차지하는 놀이였다.]
     
      어느 늦봄날이었다. 보통학교 2∼3학년 시절이라고 기억이 난다. 20리 시골길을 왕복하니 배도 고프고 봄날이라 노곤하기 그지없었다. 집에 돌아오니 정오가 훨씬 넘었다. 삽작에 들어서니 부엌에서 어머니께서 혼자서 커다란 바가지에 나물에 밥을 비벼서 드시다가 “이제 오느냐. 배가 얼마나 고프겠느냐”하시며 부엌으로 바로 들어오라고 하시기에 부엌에 책보를 든 채 들어가 보니 어머니께서는 바가지에 비름나물을 비벼서 막 드시려다가 내가 돌아오는 것을 보시고 같이 먹지 않겠느냐고 하시기에 같이 먹었다. 점심때가 훨씬 넘었으니 시장도 하지만 보리가 절반 이상 섞인 밥에 비름나물과 참기름을 넣고 비빈 맛은 잊을 수가 없는 별미다.
    나는 요즈음도 가끔 內子(내자)에게 부탁하여 비름나물을 사다가 비빔밥을 만들어 먹어 보곤 한다.

    엄동의 추운 겨울에는 저녁을 먹고 나면 가족들이 한 방에 모인다. 세상사 여러 가지 이야기가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아버지와 형들이 한방에 모여 있으니 아버지가 계신고로 형들은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 아버지께서 눈치를 알아차리시고 슬그머니 사랑방으로 내려가신다. 형들에게 담배를 마음대로 피우도록 자리를 비워주시는 셈이다. 밤이 늦어지면 이야기도 한물 가고 모두들 밤참 생각이 난다. 어머니께서 홍시나 곶감을 내어놓으실 때도 있고, 때로는 저녁에 먹다 남은 밥에다가 지하에 묻어둔 배추김치를 가져와서 김치를 손으로 찢어서 밥에 걸쳐서 먹기도 한다. 이것이 시골농촌의 겨울밤의 간식이다. 가끔은 묵을 내오는 때도 있다.
     
      [해설: 박 대통령은 워낙 비름나물을 좋아하였으나 1970년대 후반부터는 시장에서도 비름나물을 구할 수 없었다. 朴鶴奉(박학봉) 부속실장과 李光炯(이광형) 부관은 할 수 없이 씨앗을 사 가지고 와서 청와대 본관 뒷동산에 작은 밭을 일구고 심었다. 이 부관은 미끈미끈한 비름나물이 맛이 없었으나 대통령은 고추장과 참기름을 보리 섞인 쌀밥에 비벼 다른 반찬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맛있게 먹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가난했던 시절을 잊지 않으려고 비름나물 비빔밥을 먹는 것 같았다.]
     
     <趙甲濟 著 '朴正熙 傳記(全13권)' 1권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