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 14일로 탄신 93돌 맞아
  • 바지를 접어올린 사내는 낫을 들고 성큼 논으로 들어갔다.
    누렇게 익은 벼들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던 사내는 곧 익숙한 솜씨로 벼를 베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내는 제법 벼가 많이 달린 나락을 따서 손바닥에 문질렀다.
    그리곤 손바닥 가득한 나락을 하나, 둘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에서 시작한 나락 세기는 “이백이십칠, 이백이십팔”을 지나 “이백서른”에서 멈춰섰다.
    사내는 초가을 따가운 햇살에 이마에 기득한 땀을 한번 씼어 내고 환하게 웃었다.
    "그러면 그렇지, 사람이 하는 일인데..."
    그는 파안대소를 하며 밀짚모자를 고쳐 쓰곤 막걸리 한 사발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때 젊은 남자가 갑자기 호들갑을 떨며 달려오며 외쳤다.
    "각하, 저는 280알 짜리도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 사내는 깜짝 놀라며 술잔을 놓았다.
    "뭐라고? 이백 팔십알?"
    젊은 남자가 대답했다.
    "네, 제가 분명히 세었습니다."
    "임자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이백 팔십알이면 그게...."
    말을 멈춘 사내는 "당장 그쪽으로 가 보자."라며 일어섰다.
    걸어가며 사내는 젊은 남자에게 말했다..
    "이 사람아, 그렇다면 큰일 아닌가? 벼 줄기가 부러진단 말이야! 이 사람아! 그 무게가 얼만데..?"
    문제의 논으로 가서 나락을 세어보자 잘 영글기는 했는데 벼 이삭이 이백이십여개였다.
    비로소 안심을 표정의 사내는 "저 사람 저거. 아부를 해도 그렇지, 이백팔십개면 그 무게가 장정들 팔뚝 하나 무게인데"라며 싱긋 웃었다.
    나무라는 표정은 아니었다.

  • ▲ 통일벼를 살펴보는 박정희 대통령ⓒ자료사진
    ▲ 통일벼를 살펴보는 박정희 대통령ⓒ자료사진

    60년대 말 전북 김제평야에서의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이다.
    지금은 이름도 생소한 ‘보릿고개’며 ‘장리쌀’이란 용어를 없앤 것은 통일벼였다. 또 통일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집념의 결과이기도 하다.
    해마다 5~6월이면 가을에 거두었던 식량이 바닥이 나고 여름 곡식인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아 굶주릴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를 ‘보릿고개’라고 불렀다.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해 춘궁기에 벼나 쌀을 얻어 몇 개월 지난 가을에 무려 5할이나 되는 이자를 쳐서 벼나 쌀로 갚아야 하는 것이 이른바 ‘장리쌀’이었다.

    쌀을 생산하는 농민이 보릿고개 한 달을 넘기기 위해 가을에 수확을 하면 지주에게 높은 이자까지 더해 갚고 다시 굶주리는 빈곤의 악순환이 불과 30년 남짓한 당시 농촌 모습이었다.

    박 대통령은 5.16 한달 뒤에 농촌고리채정리법을 제정해 농촌의 수탈과 폐악의 악순환을 뿌리 뽑았다.
    식량증산이라는 절대절명의 과제를 풀기 위해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석학과 인재를 모아 농촌지도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획기적 식량증산이 가능한 벼품종 개발을 지시한다.
    식량증산은 공업화로 가기 위한 발판이었고, 쌀과 식량이 자급자족이 되지 않으면 공업도 없다는 것이 박 대통령의 농-공 병진 정책이었다.
    연구팀은 당시 우리보다 과학기술면에서 앞서 있던 필리핀으로 가서 벼품종 개발을 위한 기술을 배웠다. ‘통일벼의 아버지’로 불리는 허문회 교수는 필리핀 국제미작연구소(IRRI)의 초청을 받아 당시 최신의 벼 육종 기술을 배웠고, 연구팀은 7년의 뼈를 깎는 노력으로 통일벼 개발에 성공한다.

    통일벼의 성공은 이후 다양한 신품종 개발로 1977년 쌀 생산량이 ㏊당 4.94톤(일본, 4.78톤)으로 세계 최고의 기록을 세웠다. 동시에 쌀 자급자족의 꿈도 이뤄냈다.
    통일벼가 보급되면서 벼 한 포기에 80~90알 열리던 낱알이 적어도 120~140알이 달렸다.
    기적을 본 농민들은 숙명적 배고픔에서 해방되는 것에 환호했다.
    “대통령 덕분에 이제 굶지는 않는구나”라고 만세를 불렀다.
    14일은 논에 들어가 낱알을 세던 그 대통령의 탄신 93돌이 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