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毛澤東도 살고 鄧小平도 살게 한 역사결의 
      
     1981년 중국공산당의 '건국 이래 黨의 약간의 역사 문제에 대한 決議'

    鄭淳台   
     
     1981년 6월27일,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11期6中全會)는 「建國 이래 黨의 약간의 歷史문제에 관한 決議」(이하 歷史決議로 표기함)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歷史決議는 毛澤東(모택동)이 주도한 「文化大革命」(문화대혁명)의 極左路線(극좌노선)을 부정하고, 鄧小平(등소평) 체제를 확실한 이론적 기반 위에 올려 놓으면서 오늘의 중국을 經濟 제일주의의 길로 이끈 역사적 文獻(문헌)이다.
     
      8개 부문, 38개 항, 약 3만 字로 구성되어 있는 歷史決議의 실무적 작업은 中共黨 최고 이론가 胡喬木(호교목) 그룹이 맡았지만, 그 全文에는 20년에 걸친 권력투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쟁취한 鄧小平의 의지, 즉 그의 實用主義 정신이 철저하게 반영되어 있다. 鄧小平은 1980년 3월부터 1981년 6월 사이에 무려 아홉 차례에 걸쳐 「역사결의 基礎小組」에 문건의 기초와 수정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면서 세세한 부분에까지 간여했다.
     
      문제는 毛澤東이었다. 中國은 毛澤東의 呪術(주술)에서 깨어나 그의 神性(신성)과 극좌 이데올로기의 과잉상태를 약화시키지 않고서는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에 있어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었다. 그러나 歷史決議가 작성되던 무렵만 하더라도 毛澤東을 비판하는 데는 아직도 勇斷(용단)이 필요했다.
     
      毛澤東은 이미 1976년에 사망했지만, 오랜 세월에 걸친 偶像化(우상화) 작업에 의해 여전히 중국 인민들의 마음속에 독특한 역사적 지위를 차지한 「創業皇帝」(창업황제)였다. 鄧小平은 그의 「歷史決議의 基礎에 대한 意見」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毛澤東 동지의 오류에 대해 度가 지나치게 써서는 안 됩니다. 度를 넘게 되면 毛澤東 동지의 얼굴에 먹칠을 하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 黨과 우리나라의 체면에도 먹칠을 하게 됩니다』
     
      鄧小平은 毛澤東을 부정하거나 기왕의 黨결의를 全面 무효화해서도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역사를 보는 그의 균형감각이 돋보인다.
     
      『毛澤東 동지의 功過(공과)에 대해 적절하게 평가하지 않으면 고참 노동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토지개혁 시기의 빈농, 중·하층 농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毛澤東 사상이란 깃발을 내려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 깃발을 내던지는 것은 사실상 우리 黨의 빛나는 역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鄧小平은 『나에게도 잘못이 있었다』는 밑자락을 깔고 『毛澤東 동지가 만년에 이르러 사상에 일관성이 없고 어떤 이야기는 서로 모순되기도 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못박았다.
     
      『대체로 1957년(전반기)까지 毛澤東 동지의 領導(영도)가 옳았으나 1957년 (여름의) 反右派(반우파) 투쟁 이후부터 誤謬(오류)가 점점 늘어났다』
     
      그 오류의 핵심인 文革에 대해 鄧小平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문화대혁명」이 한 세대의 발전에 지장을 주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한 세대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문화대혁명」으로 無政府主義와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범람하게 되었고, 사회기풍에 심각한 害(해)를 끼쳤습니다』
     
      鄧小平은 「문화대혁명」 시기 중 「毛澤東 동지의 오류」와 「4인방의 도전」과 홍위병의 난동을 극복한 데 대해 중국공산당과 인민이 힘을 합쳐 「逆轉勝(역전승)한 기록」으로 평가했다. (월간조선 편집위원, 조갑제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