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TX는 어둠 속을 달려가고 있다.
    밤 11시 반, 정기철은 창문에 비친 제 얼굴을 보면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는다.
    옆자리의 오연희는 의자에 몸을 묻은 채 잠이 들었다. 빈틈없이 의자와 붙여진 오연희의 모습이 편안해 보인다.

    KTX는 지금 40분째 달리는 중이었는데 이제 곧 대전에 도착할 것이었다. 둘의 목적지는 대전인 것이다.
    대전은 서해안 해수욕장과 유명한 산과도 가까운 교통의 요지다. 물론 목적지를 정한 것도 오연희다.

    그때 스피커에서 곧 대전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울렸고 그 순간에 오연희가 깨어났다.
    「어머, 벌써 다 온거야?」
    혼잣소리처럼 말한 오연희가 머리를 돌려 정기철을 보았다.
    「넌 안잤어?」
    「아, 소주 한병에 곯아떨어져?」

    대답대신 그렇게 되물었더니 오연희가 손가락을 집게처럼 만들어 정기철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빨리 마시면 그래.」
    「그나저나 술 깨고 후회하는거 아냐?」
    「뭘?」
    「이번 여행.」
    「내가 언내냐?」

    다시 방송이 울렸으므로 자리에서 일어 선 오연희가 눈을 흘겼다.
    「걱정 붙들어 매. 글고 오바하지마. 네 상상처럼 작업은 안돼.」
    「무슨 말인지 이해 불능이군.」
    투덜거리면서 정기철이 앞장을 섰고 둘은 곧 한산한 대전역 플랫홈에 내렸다.

    초가을의 서늘한 대기가 머리를 맑게 만든 때문인지 둘은 잠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약간의 어색함. 그리고 또 약간의 기대감과 열정으로 정기철은 온몸이 위축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내린 사람 탄 사람을 금방 수습한 KTX가 뒤쪽에서 스르르 출발했으므로 플랫홈에는 둘만 남았다.

    「어이, 대장. 이렇게 서 있기만 할껴?」
    하고 정기철이 물었더니 오연희가 빙긋 웃는다.
    「니 머릿속에서 지금 호텔이냐 여관이냐를 궁리했지?」
    「아니, 몇단계 더 나갔어.」
    「어디까진데?」
    「텍스가 준비 되어 있는지, 없는지를.」
    「너 죽을래?」

    눈을 흘긴 오연희가 먼저 발을 떼었다. 그리고는 앞에다 대고 말한다.
    「내가 준다고 하기까진 꿈도 꾸지 마.」
    「극기 훈련에는 도가 튼 놈이라구.」
    「극기 훈련이 뭔데?」
    「참는거. 그 고통은 말도 못하지.」
    「......」
    「까짓 고추 재우는건 일도 아냐.」
    「......」
    「닥치고 눠! 하면 금방 죽어.」
    「......」
    「일어나! 하면 대번에 서고.」
    「저기로 가라.」
    하고 오연희가 가리킨 곳은 역 근처의 여관이다. 건물이 깨끗한데다 주변에 나무와 꽃을 심은 정원을 꾸며놓아서 분위기가 다르다.

    이제는 정기철이 앞장을 섰고 오연희가 뒤를 따른다. 프론트에서 키를 받아 쥔 정기철이 지갑을 꺼냈더니 오연희가 10만원권 수표를 불쑥 내밀었다. 정기철은 잠자코 그 돈으로 계산을 하고 나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방은 4층이다. 엘리베이터에는 둘 뿐이었으므로 정기철이 오연희에게 묻는다.
    「좀 싱겁지 않아? 금방 이렇게 되는게 말야.」

    그러자 오연희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닥치고 죽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