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장 끝없는 도전 ⑥  

     하루코는 스물 둘, 로노크대학 4학년으로 아카마쓰 다케오 영사의 무남독녀다.
    더욱이 어머니가 7년 전에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하루코는 아카마쓰의 하나뿐인 가족이라는 것이다.

    기숙사 내 방의 의자에 단정히 앉은 하루코는 담담하게 제 신상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것도 조선어로 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잠깐 조선 땅에서 조선 여자와 함께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났다.

    머리를 든 하루코가 나를 보았다.
    「아버님은 조선의 멸망은 대세(大勢)이며 이젠 그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잠자코 하루코의 동그란 얼굴을 보았다. 나를 향한 검은 눈동자는 깜박이지도 않는다.
    아카마쓰는 국제 정세는 물론이고 조선왕국의 실상을 낱낱이 말해 주었으리라. 그러나 내 마음은 착잡했다. 방관자가 되어서 말하는 또 다른 조선인에 대한 반감도 일어난 것 같다.
     
    「아시오? 조선은 한낱 왕조 이름일 뿐입니다. 그동안 조선 민족은 비록 타 민족의 침탈을 많이 당했지만 한번도 지배를 당한 적이 없었지요.」

    그러나 말을 하는 동안 내 가슴이 미어졌다.
    이제는 일본의 속국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병균처럼 침투해온 일본세는 조선땅 전신에 퍼져 있어서 손끝 하나 까닥하기 힘들어졌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갑자기 울분이 치밀어오른 내가 외면했다.
    눈이 뜨거워졌기 때문이다.

    그때 하루코가 말했다.
    「김윤정 영사는 더 이상 선생님을 해치려는 공작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버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잠깐 말을 멈춘 하루코가 가늘고 긴 숨을 뱉고나서 말을 잇는다.
    「선생님도 모른 척 하시고 김윤정을 이용 하는 것이 이롭다고 하십니다.」
    「허어, 그렇게까지.」

    허탈해진 내가 하루코를 바라보며 물었다.
    「하루코양, 나한테 그런 호의를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아버님께 그것부터 여쭙고 싶소.」
    「그렇게 물으실테니 이렇게 대답하라고 하시더군요.」

    차분한 표정으로 하루코가 말을 잇는다.
    「아버님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조선 민족은 지금까지 타 민족의 지배를 받지 않았고 언젠가는 다시 주권을 찾고야 만다고 하셨습니다. 일본은 지금 조선을 집어 삼켰다고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도리어 조선에 먹히는 결과가 올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1300년동안 백제어를 지켜 내려온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는 하루코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소리 없이 흰 박꽃이 열리는 것 같다. 

    「그러니 지금 당장의 현실에 격분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꾸준히 힘과 지혜를 닦으며 기회를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고마운 말씀이오.」
    마침내 내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아카마쓰의 진정성이 가슴에 닿았기 때문이다.
    지금 날 뛴다고 무슨 일이 되겠는가? 루즈벨트에게 조선인이 주먹 한번 휘두르는 꼴을 보여준다고 해도 이미 늦었다.

    그때 하루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루코는 내 생필품보다 이 말을 전해주려고 온 것이다.

    「내가 밖까지 모셔다 드리지요.」
    따라나서면서 내가 말했더니 하루코가 다시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학교 앞에서 마차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 거기까지라도.」

    코트를 집어들면서 내가 말했다. 이렇게 하루코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