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학계를 냈다. 군 입대 때문이라고 써넣기가 왠지 쪽팔려서 「사업」이라고 썼다.

    오전 10시 반, 아직 개학을 안 한 교정은 한산한 편이다.
    햇살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가을 기분이 난다. 어제 오후 갑자기 입영 신청을 하고 오늘 오전에 휴학계를 내는 자신이 마치 꿈속에서 움직이는 것 같다.

    천천히 교정을 걸으면서 어젯밤에 만난 채지수가 떠오른다.
    채지수를 그냥 혼자 보냈더니 서운한 기색을 역력하게 드러냈다. 최영도 그 놈이 최소한 한 시간이라고 떠벌리지만 않았다면 모텔에 들어가 30분쯤 놀다가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채지수는 흘려들은 척 했지만 머릿속에 그 말이 박혀 있을 텐데 5분만에 끝나면 대쪽 아닌가?

    이윽고 이동규는 도서관 옆쪽 식당으로 들어섰다. 아직 개강 전이라 이곳이 방학동안 만남의 광장 역할을 한다. 식당 안을 둘러 본 이동규는 곧 심명하를 찾아내었다. 심명하는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책을 읽는 중이다.

    다가간 이동규가 옆자리에 앉았어도 심명하는 머리를 들지 않았다. 이동규가 심명하가 읽는 책을 보았다.

    「뭐야? 공부하는 줄 알았더니 소설이잖아?」
    그러자 심명하가 이동규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콧등에 주근깨가 이십개는 되었다. 입술은 세로로 갈라진 줄이 다섯 개는 된다. 머리는 뒤로 모아 고무줄로 묶었고 자선단체 유니폼인 만원짜리 티셔츠를 입었다. 그러나 눈빛은 강하다. 깜박이지도 않는다.

    「나, 휴학계 내고 온다.」
    이동규가 불쑥 말했더니 심명하가 손에 쥐고 있던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이동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는다.
    「그러셔?」

    머리를 끄덕이는 심명하를 보면서 이동규는 가슴이 편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끝장 난 박재희가 이상형이라면 심명하는 현실형이다. 장학생에 검소한 생활, 그리고 차분하고 따뜻한 성품에 주근깨가 좀 많아서 그렇지 이만하면 용모나 몸매가 중상은 된다.

    심명하가 다시 묻는다.
    「팔자 좋으시니까 몇 년 쉬어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겠지만 최소한 휴학계 내기 전에는 나한테 이야기 해줘야 되지 않았을까?」
    「너, 참 말 길게 한다.」

    이동규가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을 때 심명하가 책을 덮고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사내같은 동작이다.
    「뭐하려고 휴학계 냈어? 말해.」

    심명하의 강한 시선을 받은 이동규가 외면했다. 같은 독문과였지만 심명하하고 가깝게 된 것은 올 신학기 때부터였으니 다섯달쯤 되었다. 독문과에는 여학생이 여덟명 있었는데 이동규는 무관심했다. 눈에 띄는 상대도 없을뿐더러 밖에 지천으로 여자들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심명하에게 노트를 몇 번 빌린 것이 계기가 되어서 밥 사고 술 마시다가 친해졌다. 그렇지만 심명하하고 손을 잡은 적도 없다. 여자 분위기를 느낀 적도 없는 것 같다.

    이동규가 심호흡을 하고나서 말했다.
    「미국에 가려고.」
    「미국?」

    되물은 심명하가 곧 머리를 끄덕였다.
    「아, 아버지한테 가려고?」

    심명하한테 이동규는 집안 사정을 이야기 해 준 것이다. 이동규가 서너번 눈을 껌벅이다가 대답했다.
    「뭐 그런것도 있고.」
    「가서 얼마동안이나 있으려고?」

    이동규는 대답 대신 심호흡을 했다. 다른 놈들이 잘난 척하면서 다 군대 빠지는 바람에 왠지 쪽팔려서 미국 간다고 했던 것이다. 괜히 짜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