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12월 24일 서울고등법원

    1973년 군 실세가 쿠테타 의혹으로 잇따라 사직했던 `윤필용 사건' 관련자가 36만에 재심에서 누명을 벗었다. 서울고법 형사8부(성낙송 부장판사)는 뇌물을 받은 혐의로 징역 3년이 선고된 김성배 전 준장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 ▲ 1973년 4월 29일 '윤필용 사건'의 당사자인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재판 내용을 듣고 있다. ⓒ 연합뉴스
    ▲ 1973년 4월 29일 '윤필용 사건'의 당사자인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재판 내용을 듣고 있다. ⓒ 연합뉴스

    재판부는 "김 전 준장을 비롯해 당시 관련자들이 육군보안사령부에 끌려가 무차별적인 구타나 가혹행위, 고문을 당하고 진술서를 작성한 것이 인정된다"고 무죄 이유를 밝혔다.

    당시 제3사관학교 생도대장이었던 김 전 준장은 진급을 위해 윤 소장에게 16만원 가량의 뇌물을 준 혐의 등으로 기소돼 징역 3년을 선고받는 등 하나회 소속 군 실세 13명이 당시 처벌을 받았다.

    #하나회의 대부

    육사 8기 출신 윤필용 장군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막강파워의 소유자였다. 또 하나회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1973년 1월 육사 11기 전두환, 손영길, 김복동, 최성택 등은 11기생으로는 처음으로 별을 달았다. 뒤이어 노태우와 정호용도 준장으로 진급했다. 하나회 핵심들이 장군으로 진급하자 하나회는 군부 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떠올랐다.
    하나회가 커지자 선배 장교들도 하나회를 지원하는 측과 견제하는 측으로 나누어졌다.
    윤필용 수경사령관, 박종규 경호실장, 차지철 경호실장, 서종철 국방장관 등이 이들을 지원하였다. 특히 윤필용은 하나회의 대부(代父)라고 불렸다. 반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강창성 보안사령관, 정승화 장군 등은 하나회 견제세력이었다.

    #“후계자는 형님이 해야 합니다”

    이러한 세력다툼 속에서 1973년 '윤필용 사건'이 발생했다. 그해 4월 한 술자리에서 윤필용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은 "박정희 대통령이 노쇠했으니 물러나시게 하고 후계자는 이후락 형님이 해야 한다"는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됐다. 윤필용과 그를 따르던 하나회 후배들이 쿠데타를 모의한 죄로 대거 구속됐다.
    이 사건으로 손영길, 권익현, 신재기 등 장교 10명이 구속됐다.
    민간인으로 육사 11기와 가깝게 지내던 이원조 제일은행 차장은 해직, 윤필용 장군과 가깝게 지내던 김연준 한양대 총장 겸 대한일보 사장은 구속됐다.
    주인공인 윤필용 장군은 육군 보통군법회의에서 8개 죄목으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벌금 2000만원에 추징금 590만원도 추가되었다.
    1975년 석방된 윤필용은 5공화국에서 도로공사 사장과 담배인삼공사 사장을 역임했다.

    윤필용 전 수도경비사령관이 24일 별세했다. 향년 83세. 7년 전 식도암 수술을 받은 윤 전 사령관은 최근 지병이 악화돼 병원에 입원한 뒤 이날 0시15분께 세상을 떠났다. 1949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윤 전 사령관은 최고회의 의장실 비서실장 대리(1961)와 연대장(1962), 육군본부 관리참모부 분석과장(1963), 육군 방첩대장(1965), 사단장(1968), 제3대 수도경비 사령관(1970)을 거쳐 1973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1980년 제4대 한국도로공사 사장을 맡았고 1982년 한미 친선회 이사, 1987년 한국전매공사 이사장, 1989년 한국담배인삼공사 이사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