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시 문제에 관한 한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는 처음부터 달랐다. '소신'과 또 다른 '소신'의 충돌이다. "정권에는 도움이 안될지라도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한때 오해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택해야 한다"는 이 대통령. "정치는 신뢰인데 신뢰가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필요하다면 세종시 원안에다 플러스 알파를 해야지 백지화는 말이 안된다"며 맞선 박 전 대표.
2005년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은 박 전 대표가 대표시절 여야 합의 처리됐다.
경선을 코앞에 둔 2007년 8월 대전·충남 합동연설회에서 박 전 대표는 "행복도시법을 통과시킬 때 대표직과 정치생명을 걸었다. 군대라도 동원해 막고 싶다는 분이 있었다"며 이 대통령을 직접 겨냥했다. 2005년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 재임시절 '손학규 경기지사는 찬성하고, 한나라당에서 동의했는데 서울시장의 대책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기자들 질문에 농담조로 "어떻게 할까. 군대라도 동원할까"라고 맞받아친 것이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수도이전을 막겠다"는 말로 와전됐던 얘기를 그대로 이용한 공격이었다.
박근혜가 물러설 수 없는 이유…"정치생명을 걸었다. 제가 약속드린다"
당시 박 전 대표의 "정치생명을 걸었다"는 발언 앞뒤에는 "지도자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 "박근혜는 약속을 끝까지 지켜냈다. 어렵게 통과된 행복도시 이제 내가 제대로 해 내겠다"는 언급이 더해졌다. 같은해 12월 충청권 지원유세에 나선 박 전 대표는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아직도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행정도시를 걱정하는 분이 많다. 대전 충남 발전에 행복도시 중요성을 알고 있다. 나는 행복도시법 통과에 대표직과 정치생명을 걸었다. 그리고 여러분과의 약속을 지켰다. 한나라당은 여러분과의 약속을 지킨다. 내가 여러분께 약속드리겠다." "아직도 많은 분이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행복도시가 제대로 될 것이냐 의구심을 가진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내가 여러분에게 약속드린다."(2007년 12월 12일, 대전·충청권 유세에서)
충청권을 향해 거듭 확인했던 '약속'은 바로 '박근혜의 약속'인 셈이다. 원칙과 신뢰를 중시하는 박 전 대표가 물러설 수 없는 이유다. 박 전 대표는 지난 23일 기자들과 만나 "이 문제는 당 존립에 관한 문제"라며 "수없이 토의했고 선거 때마다 수없이 많은 약속을 한 사안"이라고 못박았다. 그는 "이렇게 큰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앞으로 한나라당이 국민에게 무슨 약속을 하겠는가. 만약 이를 지키지 못한다면 국민은 앞으로 내놓은 한나라당 약속을 믿어주겠느냐"며 '원안 고수' 입장을 확실히 했다. 앞서 7월 몽골 방문 중에는 "충청도민에게 한 번도 아니고 여러차례 한 약속"이라며 "엄연한 약속인 만큼 지켜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세종시안 수정 요구가 거세진 상황에서 "정부가 충청도 주민이 좋아할 만한 대안을 제시하고 실제로 충청도민이 그 대안을 선호한다면 설득 여지가 있다고 본다"(이성헌 의원) "박 전 대표 입장에 변함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만고불변이란 없다. 세종시 문제는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약속 주체이므로 직접 나서 경위를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이정현 의원) 등 설득력있는 정부 대안이 있다면 박 전 대표가 굳이 형식을 고집하지 않을 것이라던 친박의원들의 예측도 빗나갔다.
-
- ▲ 이명박 대통령이 9월 16일 오전 청와대에서 대통령특사자격으로 유럽지역을 방문하고 돌아온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와 환담하고 있다. ⓒ 뉴데일리
그러나 이 대통령은 단 한번도 세종시 건설을 원안대로 하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없다.
"신행정수도 건설이 결정되기 전 내가 충남지사였더라도 이를 반대했을 것이다. 어디에 있는 것을 나눠 무엇을 해보자는 것은 가장 소극적 정책이다. 충청도에 새로운 국부를 창출해야지 서울에 있는 것을 갖다놓으면 무엇을 할 수 있겠나"(2006년 9월, 대전 유성 토론회)
서울시장 퇴임 이후 대선주자로서 이 대통령의 세종시 문제와 관련한 첫 언급에서 "이대로는 안된다. '경제논리'에 따라야 한다"는 소신이 읽힌다. 이 대통령은 행복도시법 여야합의 처리에 대한 책임에서도 자유로운 상태였다.
박 전 대표가 세종시 문제로 포문을 연 2007년 8월 같은 장소에서 이 대통령은 이렇게 반박했다. "행복도시, 사람들은 이명박이 대통령되면 걱정하는 사람이 많으시죠? 서울시장 때 분명히 반대했다. 사실이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이 선거전략으로 했다. 그러나 기왕 시작된 것은 제대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생산도 없고 고용도 없는 그런 도시가 아니라 이제 과학과 산업과 교육과 문화가 들어오는 진정한 명품도시 만드는 데 내가 앞장서겠다. 여러분 나는 한 켠으로 반대하지만 하기로 마음 먹으면 누구보다 잘할 수 있다. 믿어달라. 더 빨리 더 제대로 해내겠다." 이 대통령은 "경선은 당 대표를 뽑는게 아니라 나라 살림을 살 대통령을 뽑는 선거"라고 덧붙였다. 이미 결정된 국책사업이므로 추진은 하되 단순한 부처 이전이 능사가 아니라 자급자족이 가능하도록 도시 기능을 변환시켜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대통령의 세종시 구상은 이후 경선 과정을 거치며 좀 더 구체화됐다. "현재의 행복도시만으로는 되지않고 새로운 시설이 들어와 실질적으로 충청권 경제에 도움되는 것으로 좀 더 확대하는 계획을 갖고 있다"(2007년 1월, 충남 지역언론과의 인터뷰) "노무현 대통령이 한나라당 당직자를 불러놓고 '선거 때 재미 좀 봤는데, 한나라당도 총선 앞두고 재미 좀 보시라'고 했다. 그렇게 재미를 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2007년 8월, 대전시당 '자족능력을 갖춘 행정중심복합도시 개발' 등 지역공약 발표에서)고 이 대통령은 밝혔다.
MB, '자급자족 가능한 세종시' 추구…"재미보자고 할 일 아니다"
이 대통령은 대선 막바지 '자급자족이 가능한 이명박표 세종시'라는 공약을 내놓았다. 이 대통령은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면서도 "그러나 지금 계획을 답습하지는 않겠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취지와 방향은 살리면서 사람이 사는 제대로 된 도시가 되도록 하겠다"면서 "가장 큰 목표는 세종시 자족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세계적 국제과학도시 기능을 더해 제대로 된 도시를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도 같은 기조에서 세종시 논의가 이뤄졌다. 당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제2분과 간사였던 최경환 지식경제부 장관은 "행정기관 몇 개 간다고 해서 명품 자족도시가 된다고 보기 힘들다"며 "앞으로 어떤 기능을 어떻게 복합해 갈 것인가 하는 부분을 고민해야 한다. 행복도시를 정말 명실상부한 복합 자족 기능을 갖춘 도시로 어떻게 만들지 고민을 가지고 논의해 봤으면 좋겠다"고 지적했다.
세종시 문제가 정쟁 이슈로 떠오르자 이 대통령은 "국가 백년대계를 위한 정책에는 적당한 타협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재차 확인하면서 "정권에는 도움이 안될지라도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한 때 오해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으로서는 "'원안 추진' 약속을 지켜라"는 정치권 공세가 황당하게 들릴 법도 하다. "원안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약속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좀 더 나은 방향으로"라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여권 핵심 관계자는 "논란도 피하고 정치적 부담도 지지 않으려면 원안대로 하는 것이 제일 편하겠지만 국가 미래를 결정짓는 일을 그렇게 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는 "이 대통령은 과거에도 단순한 행정 부처 이전만으로는 지역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생각을 가져왔다"면서 "과학, 교육 기능이 추가되고 기업이 들어서야 진정한 자급자족이 가능하다는 입장일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