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30일자 오피니언면 '태평로'에 이 신문 이선민 논설위원이 쓴 시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2008년을 보내면서 못내 아쉬운 것은 대한민국 건국 60년을 온 국민이 기뻐하는 '희년(禧年)'으로 만들지 못한 것이다. 고대 유대민족이 50년마다 빚을 탕감하고 노예를 해방하여 사회 통합의 계기로 삼았던 것처럼 동양 문화권의 한민족에게 간지(干支)의 순환이 한 바퀴 끝나는 회갑(回甲)은 그동안의 분열과 대립을 청산하고 하나 될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마침 50년의 우파 정권 뒤에 10년의 좌파 정권을 지나면서 지역·계층 사이의 한(恨)도 상당히 완화된 터라 건국 60년이 국민적 동질감과 자부심을 높이는 축제가 될 것이라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 정권이 출범하고 각계 인사들로 건국60년기념사업위원회가 발족할 때만 해도 부풀었던 그런 희망은 곧 허망하게 깨지고 말았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촉발된 촛불시위가 몇 달이나 계속되면서 8월 15일은 제대로 기념하지도 못하고 지나갔다. 뒤이어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수정을 둘러싸고 격렬한 갈등이 빚어지면서 건국 60년은 우리 사회에 팬 골의 깊이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해가 되고 말았다.

    나라의 회갑 잔치를 통합이 아니라 분열의 장(場)으로 만든 책임은 우리 모두가 나누어져야 한다. 그러나 올 한 해를 지나면서 아직도 진보좌파의 상당수가 대한민국의 성공을 축하할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 것은 씁쓸하다. 그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건국 60년'을 흠집 내려고 집요하게 시도했다. 언제부터 그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그렇게 높이 평가했는지, 걸핏하면 임정에 대한 국민 정서에 편승하여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물론 진보좌파 내에 "대한민국을 긍정하자"고 주장하는 주대환 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 같은 이도 있다. 지난 연말 민노당의 북한 추종을 비판했던 그는 최근 '대한민국을 사색하다'라는 책에서 "대한민국은 세계사의 진보적 시대에 탄생한 위대한 민주주의 나라이고, 농지개혁으로 만들어진 자작농이 '한강의 기적'을 가능하게 했다"며 "이제 진보좌파는 국가와 제도를 믿고 그 속에서 개혁을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 대한 반응은 아직 차갑다. 장석준 진보신당 정책실장은 "우리가 사랑을 바쳐야 할 것은 지난 60년의 대한민국 역사가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민주공화국'"이라고 주장한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는 "우리는 이승만과 박정희의 아들딸이 아니다"라고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는 "한국현대사의 재조명은 이승만 등에 의해 아버지가 살해당한 사람들이 아버지의 지워진 이름을 한국현대사에 다시 새겨 넣는 눈물겨운 작업"이라고 했다. 대한민국을 깎아내리는 좌편향 근현대사 교과서의 수정을 끝까지 거부하는 교과서 집필자들의 의식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맞부딪치는 최전선에서 세계사에 유례없이 압축적으로 진행된 대한민국의 건국과 산업화 과정에서 상당수 사람들이 희생된 것은 사실이다. 이제 선진국 문턱에 들어선 우리는 그들을 보듬고 하나 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건국의 아버지들'의 범위를 넓히고 지워진 이름을 다시 새기는 작업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고 발전시켜온 주역들을 역사적으로 살해하는 방식이 돼서는 곤란하다.

    현실의 대한민국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민주공화국'을 사랑하는 진보좌파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은 계속될 것이다. 지금으로선 지난 대선 직후 그들 내부에서 일었던 자성(自省)의 움직임이 재개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나마 최근 합리적 좌·우파의 대화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점이 희망적이다. 새해에는 '대한민국 긍정'의 목소리가 진보좌파에 확산되고 그 바탕 위에 사회 통합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