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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많고 탈도 많던 총선이 끝났다. 역대 가장 낮은 투표율의 총선이었다. 정책도, 인물도 통하지 않은 지역주의가 다시 부활한 총선이었다. 이번 총선은 여야간의 대결이 아니라 여여간의 골육상쟁이었다. 유일하게 힘을 쓴 것은 박근혜 전 대표의 “저는 속았습니다. 국민도 속았습니다”라는 한마디였다. 선거결과는 한나라당과 박근혜 전 대표의 공동의 승리였다.
왜나하면 수도권에서 한나라당이 111석중 81석을 얻어 이명박 대통령에 거는 기대가 남다르다는 표심을 보여줬으며, 직선제 대통령 선거 이후 치러진 총선에서 17대 탄핵역풍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여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선거였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선거 승리의 주역은 당연히 강재섭 대표다. 강 대표는 이 번 총선에서 ‘공천파동’을 잠재우기 위해 불출마라는 배수진을 쳤다. 영예로운 6선을 마다하고 ‘사즉생’의 선택을 했다. 그는 총선을 진두지휘하면서 “이명박 정부가 일 할 수 있도록 과반수에서 한 두석만 더 주십시오”라고 국민에게 호소했다.
아마도 선거운동 기간 내내 그는 심중에 이순신 장군이 자신의 칼에 새겨 지녔던 문구인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 바다를 향해 맹세하면 고기와 용이 감동하고, 산을 향해 맹세하면 풀과 나무도 알았다)를 되뇌었을 지도 모른다.
선거결과는 강대표가 예견했던 것처럼 153석이 됐다. 국민들은 한나라당에게 교만하지 말고 국민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는 황금분할의 의석을 준 것이다. 7월이면 한나라당은 새로운 지도체제가 들어선다. 강대표의 임기가 3개월 남았다. 그 때까지 강대표는 5월의 민생국회와 6월의 18대 원구성, 그리고 당 대표를 선출하는 전당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내야 한다.
이 모든 과업이 끝나면 그는 표표히 정치의 중심에서 한동안은 비켜 서 있을 것이다. 건달 유방을 도와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를 제압하고 한(漢)왕조를 연 창업공신, 장자방(장량)처럼 말이다. 유방은 장량에 대해 “진중에서 계략을 꾸며 승리를 천리 밖에서 결정지었다”고 평가했다. 강 대표는 살엄음판 같던 한나라당 경선정국을 성공리에 마무리하고 대선에서 좌파정권을 종식하고 총선 승리를 일구어낸 한나라당의 ‘일등 공신’이다.
장량이 유방을 도운 사례는 수없이 많다. 강대표도 이명박 후보가 경선룰로 박근혜 전 대표와 첨예하게 대립할 때 의원직과 대표직을 걸고 ‘강재섭 룰’을 제시하여 대타협을 이끌어 냈으며, 여러 번의 분당위기를 극복했다.
장량은 유방을 둘러싸고 있던 고향 출신 패거리들(소하, 조참, 주발 등) 이른바 ‘패(沛)마피아’와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다. 한나라 건국 후 패마피아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공신들이 팽(烹)당할 때 장량만은 살아남을 만큼 누구에게나 호감을 샀다. 들 때와 날 때를 알았기 때문이다. 강 대표는 당무를 수행하면서 ‘자신보다는 당을’ 생각하며 월권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통령 측근들과 갈등을 일으킬 일도 없었고 당연히 정적(政敵)이 없다.
장량은 경세가로서의 진면모가 있었다. 유방이 항우를 앞질러 관중에 입성했을 때다. 장량은 약탈을 일절 금하고, 장악하고 있던 관중 땅을 항우에게 내주자고 주장했다. 뒤이어 입성한 항우군이 약탈을 일삼아 인심을 잃으면서 유방은 비로소 확실하게 황제 재목으로서 평가를 얻기 시작했다.
장량은 전투에서 지더라도 전쟁에서 이기는 큰 그림을 그렸다. 병법에도 공심위상(攻心爲上)이 최고의 전략이라고 했다. 유방은 관중 땅을 포기했지만 민심을 얻었고, 항우는 관중 땅을 얻었지만 민심을 잃었다. 강 대표는 의원직을 포기했지만 공천파동에서 한 발자국도 못나가던 ‘위기의 한나라당’을 구했다. 국민들에게는 선공후사, ‘자기희생’의 진수를 알렸다.
강대표가 장량처럼 은둔거사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다시 정치의 전면에 설 것인가는 오로지 국민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는 이번 총선을 통해 국민의 마음에 호소했듯이 더 깊이, 더 넓게 국민의 마음을 사야 한다. 그는 이제 대표 이후의 또 다른 국가적 지도자의 시험대에 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