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4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양상훈 논설위원이 쓴 칼럼 '우리 대통령제는 이제 치매다'입니다.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지금 대통령 선거의 양상을 보면서 대한민국의 대통령 제도 자체가 수명을 다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뇌는 실질적 수명을 다했는데 육체는 명(命)을 마치지 않고 있는 상태가 치매다. 우리 대통령제는 이제 그런 상태로 들어간 것 같다.

    대선 때만 되면 우리 정치인들과 정당들은 제 정신이 아니다. 정말 미치는 듯 하다. 노태우·김영삼·김종필 3당 합당, 김대중 정계은퇴 번복, 김대중·김종필 연대와 파탄, 이인제 경선 불복,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및 결별과 같은 충격적 사건들을 정상(正常)이라 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이회창 정계은퇴 번복과 탈당, 손학규 탈당이라는 사태가 벌어졌다. 여당은 한 사람이 석 달 만에 세 번 탈당하고 세 번 창당하는 세계적 기록을 세웠다. 이번에 민주당하고 또 합친다니 인류 역사에 남을 기록을 만들 모양이다. 모두가 대선 병(病)이다.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 경선은 유령선거인단, 대통령 명의 도용, 차떼기 동원, 10%대 투표율로 구제불능의 상태에까지 갔다. 나중에는 흥행을 일으킨다면서 불법 가능성을 열어놓고서 휴대폰 투표까지 했다. 다음 대선에선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한나라당도 경선은 어떻게 마쳤지만 후유증을 억지로 봉합해놓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난리를 친 다음에 결국 등장한 후보들을 보니 대선 3수(修)생이 세 명이나 된다. 한 사람은 이번에 경선 불복한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과거 두 번의 경선 불복 경력자다. 이것이 우리 대통령제의 몰골이다.

    대선 때마다 이러는 것은 단 한 표만 이겨도 모든 것을 독식하고, 단 한 표만 져도 모든 것을 잃기 때문이다. 이 정치 로또판에서 다 먹느냐 다 털리느냐에 몰린 사람들이 무슨 짓이든 못할 리가 없다. 그 중 하나가 이길 가능성이 높은 후보를 고른다면서 여론조사로 후보를 뽑는 일이다. 여론조사는 기관마다 수치가 다르다. 같은 기관 조사도 오차가 있다. 이것을 마구잡이로 득표로 환산하니 각 당 경선에선 여론조사가 실제 투표의 몇 배 위력을 발휘했다. 이것은 선거도 아니고 과학도 아니며, 단지 주사위 던지기다.

    실제 대선 본선은 도박판과 다를 것이 없다. 정책도 없고 비전도 없다. 오로지 ‘한 방’이 관건이다. 1997년 대선은 경선 불복 한 건이 승부를 갈랐고, 2002년 대선은 김대업과 여론조사 단일화가 결정타가 됐다. 이번에도 경선 불복, 여론조사 단일화, 문서위조 사기범 등 나올 것은 다 나오고 있다. 이러니 누구든 요행수를 바라며 대선 판에 기웃거리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이렇게 해서라도 위대한 인물이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다면 또 모른다. 1987년 6·29 선언 이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 세 사람 다 마지막에 식물대통령이 됐다. 모두 그들 자신과 가족의 무능·비리 탓이었다. 현직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들이 대통령이란 자리 자체에 신물을 내게 만들었다. 그래도 5년을 속수무책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이게 무슨 대통령책임제인가. 이번 대통령 후보 중에 위대한 대통령 감이 없다는 것도 다 아는 얘기다. 그렇다면 그 다음엔?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 세계에서 대통령제를 제대로 하는 나라는 미국 등 극소수뿐이다. 미국의 대통령제는 제 몸에 맞춰 입은 옷이다. 그 옷을 우리가 입고 60년이 지났다. 이 제도를 갖고서 세계 최빈국에서 13위까지 올라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이 제도는 사명(使命)도 다했고, 수명도 다했다. 노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못해먹겠다”고 했다. 임기 내내 그 소리였다. 이것은 한계에 이른 대통령제가 내지르는 비명이나 마찬가지다. 오늘 날 대한민국 대통령제의 현실은 시쳇말로 벽에 × 싸 붙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각 당이 다음 국회에서 개헌을 논의하기로 약속했다. 대통령 중임제나 결선투표제, 내각제를 한다고 반드시 나아진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한 번 다 터놓고 논의는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