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9일자 오피니언면에 유호열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가 쓴 시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드디어 7년여 만에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된다. 6·15 공동선언에서 후속 정상회담을 약속했기에 그렇게 놀랄 만한 역사적 사건은 아니다. 남북관계의 특수성과 북한체제의 속성상 남북정상회담의 필요성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론이 없다. 그럼에도 정상회담 개최 시기와 장소, 그리고 의제 등 모든 면에서 만족스럽지 못하다. 우선 8월 28일까지는 불과 3주밖에 남지 않았다. 그만큼 남북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데드라인에 걸려있었다는 반증이 된다.

    임기가 6개월밖에 남지 않은 노무현 정부는 재임 기간 동안 뚜렷한 업적이 별로 없고 국민들의 지지도는 바닥을 맴돌고 있다. 임기 말 레임덕 현상을 넘어 대선 정국에서 범여권으로부터 걸림돌 취급마저 받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은 모든 악재를 일거에 만회하고 정권 재창출을 주도할 수 있는 회심의 카드였다.

    북한으로서는 6·15 공동선언의 합의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미진했던 경제협력을 본격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핵문제 해결과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북미 간 담판을 위해 남한을 종속 변수로 묶어 둘 시점이 되었다. 남한의 대선 정국에 개입하고 차기 정권에도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정상회담은 유효한 수단이기도 하다. 북한은 정상회담 개최에 동의하면서도 시기는 주변 정세와 남북관계 상황을 검토해 결정하겠다고 했었는데 지금이 바로 그 적기(適期)인 셈이다. 결국 정상회담을 서둘러 개최하게 된 것은 남북 정권의 서로 다른 이해가 마지막 순간에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개최 장소가 평양으로 결정되었는데 실사구시 차원에서 장소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주장은 북한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소치이다. 회담에서 장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6·15 공동선언에서 서울 답방을 명문화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잘 알고 있다. FTA 같은 통상회담도 장소를 번갈아 개최하는데 하물며 남북정상회담을 평양에서 연속 개최한다는 것은 국가 위신은 물론 회담 전략으로서도 하수임을 자임한 꼴이다. 정상회담 실무준비회담을 개성에서 개최키로 한 것도 허허벌판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을 했던 역사적 경험을 살리지 못한 단견이다. 편하게 모시기 위해 평양 회담을 제안한 이유는 말 그대로 옥류관 냉면이나 먹고 대동강 뱃놀이나 하고 가라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냉철한 회담 전략에 따라 회담을 일방적으로 주도하겠다는 속뜻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회담의 의제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정상회담 개최는 성급하고 위험하다. 단순히 남북의 최고 지도자가 갖는 것은 2000년 1차 정상회담으로 족하다. 남한의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으나 임기 말 노무현 정부로서는 뚜렷한 의제 없이 정상회담을 하는 것은 회담의 실효성도 의문시될뿐더러 차기 정부에 이행 의무를 떠넘기는 무책임한 일이다.

    정상회담을 통해 북핵문제 해결을 장담하고 있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평양 방문에 관한 남북합의서에는 어느 구석에도 그런 구절이 없다. 우리민족끼리 한반도의 평화, 민족공동의 번영, 조국통일문제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본격적으로 북핵 불능화를 다룰 차기 6자회담에 장애를 조성하지 않고 남남갈등과 한미동맹 이완을 초래할 섣부른 평화선언을 감행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전격적으로 발표된 2차 남북정상회담은 김정일 위원장으로서는 잃을 것이 전혀 없는 꽃놀이패라면 노무현 정부로서는 마지막 도박판이다. 단판 승부를 벌이려는 지도자를 바라보는 국민들이나 경선을 불과 열흘 정도 남겨둔 한나라당으로서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상회담은 개최 자체보다 그 결과에 따라 평가할 수밖에 없는 현 상황에서 정부나 여야 정치인들의 국가와 국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양식과 책무를 촉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