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9일 사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8월 28~30일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갖는다고 양측에서 동시에 발표했다. 예상됐던 일이다. 전 총리부터 대통령의 왼팔이란 측근까지 여권 정치인들이 평양과 중국을 계속 드나들며 북한에 남북 정상회담을 하자고 매달려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고 얼마 전부터는 그 시기가 8월이 될 것이란 예상까지 나온 바 있다.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정권의 이런 집착으로 볼 때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약속한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이 없던 일로 돼버린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노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 정례화의 기틀을 마련하겠다”고 했지만, 이런 식으로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평양에 가서 알현하는 식의 정상회담 정례화라면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다.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서 대화하는 자체는 바람직한 일이다. 다른 어떤 회담보다 북핵 폐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있다. 현재 북핵 6자회담은 북한의 핵물질 신고와 핵시설 불능화라는 결정적 단계를 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지금까지 핵문제 논의에서 남한을 철저히 배제시켜 왔다. 그 문제는 미국하고 나눌 이야기이니 남한은 끼어들지 말라는 것이다. 핵은 미국과의 수교 등 미·북관계 정상화를 위한 협상 소재이고 미국과 북한의 합의 결과에 따라 남한은 돈만 대라는 것이 북한의 일관된 방침이다. 북한이 이 방침을 바꿨다는 정황은 어디에도 없다. 북한은 이번 회담을 미국으로 가는 길을 뚫는 데 필요한 통과의례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북한이 이 방침을 고수한다면 앞으로 한반도 정세 변화의 주역은 미국과 북한이 맡고 한국은 그 뒤나 따라가는 조역으로 전락할 위험까지 감수해야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번 정상회담은 민족 대단결 운운하는 말 잔치를 되풀이하고 우리는 막대한 잔치비용을 대는 것으로 그칠 수 있다.

    노 대통령은 지난 6월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남북 정상회담 문제에 대해 “전임 사장이 발행한 어음은 후임 사장이 결제하는 거다. 내 임기가 두 달이 남았든 석 달이 남았든 (북한에) 가서 도장 찍고 합의하면 후임(대통령)이 거부 못한다”고 했었다. ‘내 맘대로 일을 저질러도 너희들이 어쩔 수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것이 노 대통령의 생각이다. 남북 정상회담이 이런 식으로 되고 정작 한반도 정상화의 출발점인 핵문제는 비켜 간다면 이번 남북 정상회담은 대한민국에 재앙이 될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은 사실상의 임기가 석 달여밖에 남지 않은 상태에서 정상회담을 하게 된다. 중대한 회담의 상식에 벗어나는 일이다. 김 위원장이 지난 4년여 동안 거부하다가 왜 남한 정권의 수명이 다 끝난 지금 이 시점에서 회담을 받아들였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은 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 한창인 시점에 발표됐다. 또 회담은 야당 대선 후보가 확정된 지 8일 뒤에 열린다. 그에 이어서 여당 대선 후보 경선전이 시작되고 곧 대통령 선거다. 야당의 기세엔 찬물을 끼얹고 여당의 상승세는 부추길 수 있는 타이밍이다. 지난 2000년 남북 정상회담도 국회의원 총선 투표일 3일 전에 발표된 바 있다. 남북 정상회담이 번번이 대한민국의 선거를 앞두고 이렇게 반복되는 상황에서 남북회담의 정략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북한은 올해 들어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전쟁 난다”는 식으로 남한 대선 결과에 대해 극단적인 초조감을 보여 왔다. 기획 탈당, 간판 세탁 등 온갖 방법이 다 실패한 남측 여권도 남북 정상회담 성사에만 목을 매고 있었다.

    북한은 정상회담으로 남한 정권에 도움을 준 대가를 반드시 요구할 것이다. 2000년 회담 때는 뒷돈으로 5억달러를 챙겼다. 이번 회담 성사의 전후 내막 역시 다음 정권이 되면 밝혀질 것이다. 대규모 대북 지원이 미리 제시됐을 가능성도 높다. 그 천문학적인 돈은 결국 남한 국민의 세금이다. 다음 정권에까지 부담을 주는 합의는 이 정권 독단으로 할 수 없다.

    이날 남북 정상회담이 발표된 뒤 한국갤럽이 실시한 긴급 여론조사에서 회담 시기가 지금 적절하다(49.1%)는 의견 못지않게 다음 정권으로 넘겨야 한다(42.8%)는 의견도 많았다. 특히 이 여론조사에서 이번 정상회담이 성과를 거둘 것이란 의견은 35.5%에 그쳤고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는 견해가 58.7%에 달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국민의 눈을 등 뒤에 지고 평양에 가는 것이란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