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8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창균 정치부 차장이 쓴 '이명박 죽이기, 이명박 구하기'입니다.

    야당 대선후보에게 국가정보원과 검찰은 저승사자처럼 겁나는 존재다. 역대 정권에서 권력기관들은 ‘야당후보 죽이기’ 선봉에 나서곤 했다. 그러나 요즘 사정은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 이명박 캠프는 국정원과 검찰을 상대로 게임을 즐기는 분위기다.

    이명박 캠프의 핵심 인사인 이재오 의원은 지난 8일 “국정원이 이명박 X파일을 작성했다는 확실한 제보가 있다”고 말했다. 이런 의혹 제기는 야당이 단골로 써먹는 메뉴다. 사실여부를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믿거나 말거나’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번엔 뜻밖의 시나리오가 전개됐다. 국정원은 이재오 의원이 ‘X파일’ 얘기를 꺼낸 지 닷새 만에 국정원 소속 직원이 이명박 후보 자료를 뒤진 사실을 실토했다. 이명박 캠프가 국정원이 한 일을 너무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국정원이 야당후보의 뒤를 캤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대선 판이 출렁이고 있다. ‘박근혜가 이명박을 공격하는 구도’에서 ‘이명박이 노무현을 공격하는 구도’로 바뀌었다. 이명박 캠프가 바라던 그대로다. 지난 한 달 ‘검증 잽’을 맞으며 수세에 몰렸던 이명박 캠프가 ‘X파일 한방’으로 공세로 돌아섰다. 이명박 캠프는 겉으론 김만복 국정원장의 해임을 요구하지만, 속 마음은 김 원장 볼에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이명박 캠프는 검찰이 ‘이명박 의혹’ 수사를 특수부에 맡기며 의욕을 보이자 처음엔 매우 불안해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긴장감을 푸는 분위기다. 한 캠프 관계자는 “검찰 내부 공기가 캠프에 상세히 전달되고 있다. 검찰 내 누군가가 ‘이명박 죽이기’에 나서면 곧장 되받아 칠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이명박 캠프가 이 후보의 처남 김재정씨의 고소 사건을 취소 않고 검찰 손에 운명을 맡기기로 한 것도 이런 자신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명박 캠프는 지난달 열린우리당 김혁규 의원이 이 후보의 위장전입을 폭로한 후 관할 동사무소에 “이 후보 친인척의 주민등록 초본을 누가 떼 보았는지 자료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서울시내 동사무소, 구청 등 8곳이 관련 초본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한 사실이 확인됐다. 이들 동사무소, 구청은 이 후보 캠프에 경위서를 보냈다. “실수로 초본을 발급했었지만 즉시 파쇄했다”며 자신들의 결백을 호소하는 내용들이었다. 한 동사무소 관계자는 “저는 이명박 후보님과 같은 고향 사람으로서 이 후보님의 적극적인 후원자입니다”라며 선처를 빌기도 했다.

    아무리 임기 말이라지만 야당 후보캠프가 권력기관 내부를 자기 손금처럼 들여다 본다는 것은 정권의 수치다. 신분이 공무원인 사람이 ‘야당 후보의 적극적 후원자’를 자처하는 것도 생소한 장면이다. 만일 지금 여권에 대선주자 한 명이 뚜렷이 부각돼 있고, 그 대선주자를 중심으로 여권이 결집돼 있다면 도저히 벌어질 수 없는 일들이다.

    임기 말 정권의 힘은 정권 재창출의 가능성과 비례한다. 권력기관은 임기가 반년 남은 대통령보다 차기 여권 주자의 당선 전망을 염두에 두고 정권에 봉사하는 법이다.

    노무현 대통령으로선 속이 뒤집힐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남의 탓을 할 수도 없다. 지금 야당 후보에 힘이 쏠리는 가장 큰 이유는 노 정권의 실정(失政)에 따른 반대 급부다. 노 대통령은 또 고건 전 총리,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같은 유력한 대선주자들에게 집중 견제타를 날리면서 낙마 시켰다. 다른 주자들이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통해 자신의 주가(株價)를 올리려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올 들어 레임 덕(임기말 권력누수 현상)이 올까 극도의 피해의식을 보여 왔다. 그래서 혼자 목청을 높여 왔지만 정작 권력을 쥔 손아귀 힘은 현저히 풀린 상태다. 권력기관의 어설픈 ‘야당후보 죽이기’는 ‘야당후보 구하기’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 권력의 아이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