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일보 16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백화종 편집인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그만 좀 하시죠. 내 차례니 내가 발언하게 해 주세요. 옛날 대통령한테도 이렇게 했습니까." 지난주 청와대 회의에서 기초단체장과 논쟁하던 한 광역단체장이 마이크를 놓지 않자 노무현 대통령이 역정을 내며 했다는 말이다.

    노 대통령의 현 위상을 잘 보여주는 한 장의 삽화다. 국정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에서 참석자들끼리 주제 외의 문제로, 그것도 차례가 된 대통령의 발언을 막으면서까지 논쟁할 수 있을 만큼 세상이 좋아진(?) 것이다.

    노 대통령의 말처럼 옛날 대통령 앞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혹 권위주의 시절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 사람은 경호원들에게 정강이가 차이거나 옆구리를 쥐어박혔을 것이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권위주의가 청산됐다고 웃어야 할까. 아니면 집안이 콩가루가 되고말았다고 울어야 할까.

    노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정권 차원의 권위주의는 확실히 구시대 유물이 됐다. 노 대통령과 평검사들의 공개 입씨름으로 붕괴가 시작된 권위주의는 옛날 대통령들과는 다른 그의 파격적 언행이 이어지면서 종언을 고했다.

    노 대통령이 권위주의를 걷어낸 점은 뒷날 충분히 평가받으리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지금만큼 많은 사람이 보복의 두려움 없이 대통령 비판을 하고 살던 때가 얼마나 됐던가.

    문제는 대통령의 권위마저 함께 휩쓸려가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지도자를 향한 존경심 신뢰 구심력 이런 것들이 실종돼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대통령이 내 차례이니 발언 좀 하자고 사정해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자연인 노무현의 권위가 추락하는 거야 별일 아니나 대통령 노무현의 권위가 추락하면 일은 심각해진다. 국정 수행이 제대로 안 되는 것이다. 정부가 하는 일은 국민 통합을 이끌어내는 대신 대부분 조소의 대상이 되고, 정부가 한 일은 잘 된 것마저도 빛을 보기는커녕 제대로 평가받기 힘들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른 건 절대다수 국민이 청개구리 심보를 가졌거나 노 대통령과 정치적 견해를 달리해서만은 아니다. 자업자득, 노 대통령 자신이 어깃장 등 가벼운 처신으로 벌어들인 측면이 강하다. 최근 선관위를 상대로 한 투정이 단적인 예다. 노 대통령은 선관위가 한나라당 대선 주자를 비판한 것 등이 선거법상 대통령의 선거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고 판정하자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선거법이 "이놈의 헌법"에 위반된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또 앞으로는 발언 전에 위법 여부를 일일이 선관위에 물어보겠다고 어깃장을 놓았으며 지난 주 그걸 실천에 옮겼다. 그리고 선관위가 답변을 거부하자 이명박 전 서울시장 등을 비난하는 발언을 해도 되느냐고 질의했었다며 그 내용을 공개했다.

    사실 최고위 선거직이며 당적을 가질 수 있는 정치인인 대통령의 정치적 발언까지 금지하는 게 타당한가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국법질서 수호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 헌법기관의 결정을 비아냥대고 현행법의 효력을 문제삼으며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건 아무래도 대통령다워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선관위에 실제로 질의서를 보내고, 야당 주자를 폄하하는 등의 질의 내용을 공개한 것은 참으로 가볍고 유치하기까지 한 처신이다. 심판이 욕설을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자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을 담은 질의서를 심판에게 보내 이런 욕설을 하면 위법이냐고 물은 뒤 질의서를 큰 소리로 외치는 짝이다. 노 대통령과 그 주변 사람들의 이런 격에 맞지 않는 언행이 대통령의 권위를 훼손하여 국정 수행마저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이 말은 임기가 다 돼가는 노 대통령보다는 다음 대통령을 뽑을 국민과 다음 대통령을 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