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8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강천석 주필이 쓴 <'광인(狂人)전략'과 이명박·박근혜>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요 며칠 정치뉴스는 노무현ㆍ이명박ㆍ박근혜 세 사람이 완전 독점하고 있다. 노무현은 이명박과 박근혜를, 박근혜는 이명박을, 이명박은 다시 박근혜를 물어뜯는 ‘적(敵)과의 동침(同寢)’ 관계를 이어가면서 세 사람이 신문 정치면을 전세 낸 듯한 모양이다.

    독자가 많은 상위(上位) 3개 신문의 독자 합계가 전체 독자의 60%를 넘는 순간 권력이 신문에 갖가지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세계 유일의 신문법을 만든 게 이 정권이다. 그 정권 아래서 이 같은 정치 뉴스의 100% 완전독점 공급사태가 빚어진 것은 희극(喜劇)중의 희극이다.

    그러나 가만 보면 주연(主演)이라 해서 급(級)이 다 같은 게 아니다. 대한민국 극장가를 휩쓸다시피한 ‘지는 정치인ㆍ뜨는 정치인’의 확실한 주연은 역시 대통령이다. ‘세계적 대통령’이 제작ㆍ감독ㆍ출연한 엊그제의 4시간짜리 원맨쇼는 작은 폭풍을 몰고 왔다. 반응이 좋았다는 게 아니라 야유 섞인 휘파람 소리가 그만큼 요란스러웠다는 말이다. 헌법, 국군 원로, 창당(創黨) 동지, 반대당과 반대당 예비후보들?. 대통령 입방아에 오른 것은 어느 하나 성한 게 없었다. 이 와중에서 몸을 다치지 않은 부류는 대통령이 기르고 있는 예비후보들과 ‘노사모’류의 측근 등 ‘애완용(愛玩用) 인간’뿐이다.

    물론 대통령의 원맨쇼를 통해 결정적으로 파괴돼버린 사람은 대통령 본인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여유만만이다. 중앙 선관위까지 쳐들어 갈 정도다. 영화가 대박이 나면 인기가 몇 뼘 올라갈 것이고, 영화가 쪽박을 차도 어차피 몇 달 후면 무대에서 내려올 처지에 애달플 게 없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이번 원맨쇼 흥행(興行) 결산에서 첫 손가락에 꼽을 소득은 국민과 야당에게 ‘대통령은 무슨 일이든 벌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경고해 둔 것이다.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는 사람, 무슨 일이든 벌일 수 있는 나라만큼 두려운 것은 세상에 없다.

    1956년 헝가리 시민들이 반정부 데모를 벌이자 헝가리 경찰 대신 난데없이 국경 너머 소련 탱크가 진압에 나섰다. 68년 같은 일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되풀이됐다. 그래서 소련은 무서운 나라가 되었다. 1972년 미국ㆍ베트남 휴전협상이 지지부진하자 미국 대통령 닉슨은 느닷없이 북 베트남의 하이퐁항(港)에 어마어마한 폭격을 퍼부었다. 베트남은 꼼짝없이 협상장으로 되돌아왔고, 그 후 닉슨은 두려운 대통령이 되었다.

    국제정치에 이따금 등장하는 ‘광인(狂人)전략(madman strategy)’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현대 세계에서 ‘광인전략’의 대가(大家)는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북한 통치자들이다. 김일성-김정일이란 예외가 있긴 해도, ‘광인전략’이란 원래가 국제관계에서 적대국을 상대로 쓰는 전략이다. 민주국가의 대통령이 자기 국민에게 ‘나는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어’라고 으름장을 놓을 순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 대통령은 국민과 야당과 야당 예비후보들에게 ‘내가 누군지 알긴 알아’라는 등골 오싹한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면 투자하지 않을 대운하 사업을 공약이라고 들고나왔다”는 면박을 받은 이명박과 “한국 지도자가 독재자의 딸이라고 해외 신문에 나면 곤란하다”는 인신공격을 받은 박근혜 사이의 검증공방을 밀고 나가는 배후의 힘은 대통령의 이 ‘광인전략’에 대한 두려움이다. 당내 예선을 아무일 없이 통과한다 해도 본선에선 무사할 수 없다는 검증파(檢證派)의 논리가 딛고 있는 것도 바로 이 ‘광인전략’이다.

    사실 “무슨 일이든지 저지를 수 있다”고 선언한 대통령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한나라당의 집권을 손 놓고 바라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게 무서워 서로 물고 뜯다 두 사람 모두 피를 흘리고 쓰러지게 만드는 것이 대통령에겐 ‘상지상책(上之上策)’이다. 물고 뜯기는 싸움 끝에 누군가가 기진맥진한 채 살아 남는다 해도 그리 서운할 게 없다. 대통령의 최후 일격(一擊)이 그를 너끈히 잠재워 버릴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광인전략’의 최종 표적은 지금의 어느 누구가 아니라 이명박과 박근혜의 사생결단식(死生決斷式) 싸움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바로 그 사람이다. 노무현은 결코 ‘지는 정치인’의 흘러간 이름이 아니다. 노무현은 지금 이명박ㆍ박근혜를 제 목덜미 물려도 죽고 상대 목덜미 물어도 죽는 ‘바보 싸움’으로 몰아넣고 있는 저승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