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나라당 차기대권주자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이명박 전 서울시장,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 원희룡 의원이 한 자리에 모였다. 강재섭 대표가 마련한 29일 당 지도부와 대선주자들간의 간담회자리에서다. 한나라당 ‘빅3’(박근혜·이명박·손학규)가 함께 한 것은 7·11전당대회 이후 171일만이다.

    서울 여의도 한 음식점에서 진행된 이날 간담회는 시작부터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면서 대선주자들간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펼쳐졌다. 또한 대선주자들을 내내 서서 기다리는 강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의 모습에서 대선주자들의 당내 위상이 단적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오후 7시 정각 간담회장에 나란히 모습을 나타낸 이 전 시장과 손 전 지사, 원 의원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당 지도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특히 세 명 중 가장 먼저 입장한 이 전 시장은 강 대표에게 “요즘 좋은 일 있느냐”고 인사말을 건넨 뒤 그 자리에 참석한 당 지도부와 차례로 악수를 나누고 농담을 주고받는 등 가장 활기찬 모습을 보였다.

    이 전 시장과 손 전 지사, 원 의원이 간담회장에 모인 사람들과 모두 인사를 나눈 뒤에도 박 전 대표가 모습을 나타내지 않자 강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는 계속 서서 박 전 대표를 기다렸으며 이 전 시장은 5분가량이 지나자 시간을 확인하기도 했다. 7분 늦게 간담회장에 도착한 박 전 대표는 미안한 듯 당 지도부와 악수를 하는 동안 내내 “제 손이 너무 차서요”라며 서둘러 왔음을 에둘러 표현했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자리에 착석한 대선주자들은 발언 순서를 놓고도 잠시 신경전이 벌어졌다. 강 대표의 인사말 이후 기자들의 녹음기가 담긴 상자는 자연스럽게 박 전 대표 앞으로 옮겨졌다. 전임 당 대표에 대한 예우 차원으로 보였다. “단결해서 국민들께 좋은 모습 보여드리고 희망 꼭 드렸으면 좋겠다. 열심히 노력해 더 많은 지지를 받는 당이 되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는 박 전 대표의 짧은 발언 뒤 녹음기 상자는 박 전 대표 왼쪽에 앉아 있는 이 전 시장에게 넘어갔다. 이 전 시장은 박 전 대표보다 두 배 정도 길게 말했다.

    이어 발언 순서를 말해주는 녹음기 상자는 이 전 시장 왼쪽에 있던 원 의원이 아닌 멀리 돌아서 박 전 대표 오른쪽에 앉은 손 전 지사에게로 이동했다. 손 전 지사는 “가까운데 먼저 하지…”라고 했고 원 의원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대선주자들 사이에도 순위가 매겨지는 순간이었다.

    긴장감은 있었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던 간담회는 손 전 지사가 쏟아낸 ‘폭탄발언’으로 반전됐다. 작심한 듯 미리 발언할 내용까지 준비해 온 손 전 지사는 이 전 시장을 겨냥해 “의원들에게 줄서기를 강요해 허수아비를 만들어 놓고 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특정 캠프의 특정 최고위원 이름이 자주 거론되고 있다. 문제의 최고위원은 당원과 국민 앞에 사과하고 특정 주자 참모장 역할을 내놓든지, 최고위원만 하든지 거취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도 했다. 이 전 시장 최측근인 이재오 최고위원을 두고 한 말이다. 이 최고위원은 이날 개인 일정상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자신을 향한 손 전 지사의 강도 높은 비판을 듣던 이 전 시장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으며 일순간 간담회장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큰 소리로 웃으며 대선주자들 중 가장 크게 박수를 친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활기찼던 이 전 시장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3분 동안 쏟아진 손 전 지사의 ‘폭탄발언’ 다음은 원 의원 차례. 녹음기 상자를 건네받은 원 의원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자 손 전 지사에 이어 ‘두 번째 폭탄’이 터지나하는 긴장감이 흘렀다. 옆에 앉아 있던 이 전 시장이 “(발언 내용) 적어온 사람들 겁나네”라고 ‘뼈있는 농담’을 하자 원 의원은 “그런 내용은 없으니 기대하지 마시라”고 안심시키기도 했다. “서민의 아픔을 끌어안는 따뜻한 보수, 미래를 개척하는 창조적인 보수로 거듭나야 한다”며 한나라당의 변화를 강조한 원 의원의 발언을 끝으로 간담회는 비공개로 진행됐다.

    1시간 30분 정도 진행된 간담회를 끝내고 나오는 대선주자들은 모두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고 입을 모았지만 나경원 대변인이 브리핑한 비공개 회의는 손 전 지사가 터뜨린 ‘폭탄’의 잔해가 곳곳에 엿보였다. 강창희 최고위원은 “손 전 지사가 세게 나온다. 센소리 할 때는 보라색 넥타이를 매는 것 아니냐”고 말했으며 강 대표도 “박 전 대표가 전투복으로 바지를 입는 것과 같은 것 아니냐”고 손 전 지사가 강도 높은 발언을 쏟아냈음을 지적했다. 강 대표는 간담회를 마치고 나오며 "살기훈훈했다"고 분위기를 총평했다.

    “당 화합과 결속을 도모하고 안정적인 수권정당의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정정당당, 희망경선, 절대승복, 대선필승’이라는 모토까지 내걸고 당 지도부가 마련한 이날 간담회는 결국 당내 대권경쟁에 더욱 불을 지핀 꼴이 됐다. 간담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대선주자들의 뒷모습에서 순탄치 못할 당내 경선 과정이 오버랩 되기도 했다.

    한편 이날 간담회에서 당 지도부와 대선주자들은 공정한 경선에 대한 공감대는 형성했지만 경선승복 등 뚜렷한 합의점을 도출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