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6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두우 논설위원이 쓴 '북 핵실험 타고 부활하는 DJ'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국내 정치는 곧잘 북한 변수의 영향을 받는다. 대선 국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내년 12월 실시될 17대 대선은 어느 때보다 그 가능성이 크다. 북한 핵실험 문제가 단시간에 해소될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고 발표하자 남한은 처음에는 한목소리로 북한을 규탄했다. 그러나 불과 몇 시간 가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북 포용정책의 재검토를 언급하자 소위 진보 진영은 약속이나 한 듯 들고일어났다.

    DJ가 선봉에 섰다. 그는 핵실험 바로 다음날 "햇볕정책을 통한 남북 관계 발전은 제대로 해 왔고 성과도 있다"고 했다. 그 다음날에는 "대북 포용정책이 왜 죄인가"라고 반문하면서 '부시 정권 책임론'까지 거론했다. DJ의 발언을 전후해 주사파(주체사상 추종자)와 민족해방(NL)계열, 한총련과 민주노총 등이 '미국 책임론'과 '북한 동정론'을 일제히 쏟아냈다. NL계가 주도하는 민노당과 DJ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한 민주당은 물론 열린우리당의 상당수 의원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진보 + 호남' 촉매 역할 자임

    DJ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인 것은 필생의 업적이라고 자부하는 햇볕정책과 노벨평화상이 무위로 돌아가는 상황을 맞았기 때문이다. 햇볕정책의 실패는 자신의 정치 인생의 실패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정치 상황도 맞아떨어졌다. 현직 대통령은 힘이 빠질 대로 빠졌고, 여당은 대선주자 하나 제대로 낼 수 없어 '외부선장 영입'이나 정계개편을 모색하는 실정이다. 말이 좋아 '민주평화세력 연합' '중도개혁세력 연합'이지, 사실은 자신들이 깨고 나온 민주당과 재통합하겠다는 것이다. 호남과 진보 세력을 다시 그러모아 2002년 대선의 역전극을 재현하겠다는 것이다.

    DJ는 이를 읽고 있었다. 그래서 명분과 계기를 찾지 못하고 있는 정계개편의 촉매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민족의 운명을 진흙탕 속에 처박은 북한 핵실험을 기회로 삼아 말이다. DJ가 최근 민주당 분당 사태와 대북송금 특검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살아 있는 권력의 무서움을 잘 알기에 불만을 속으로 감추고 있다가 현 정권의 힘이 약해지자 분당과 대북송금 특검을 실시한 노 대통령의 책임을 공개적으로 추궁한 것이다. 그는 어쩌면 "호남과 진보가 노무현을 잘못 선택했다" "다가올 정계개편에서는 노무현을 배제하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노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과의 청와대 회동 다음날 DJ에게 직접 전화해 "어제 불편하게 해 죄송하다"고 유감을 표명한 것은 현 상황에서의 승자가 DJ임을 의미한다. 김근태 당 의장, 정동영 전 당의장도 '햇볕정책 계승' '열린우리당 창당 실패'를 외치며 사실상 DJ에게 백기를 들었다.

    여당, 반미전선 재구축하려 하나

    80세를 훌쩍 넘긴 노 정치인이야 민족의 운명보다는 자신의 명예가 더 소중할 수도 있다고 치자. 여당의 태도는 도대체 뭔가. 미국 책임론만 해도 그렇다. 미국에 책임이 없다는 게 아니라, 국민의 착시현상을 유도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연쇄살인범은 빨리 잡아 범행을 중단시키는 게 우선이다. 그런데 경찰이 범인을 잡을 생각은 않고 "연쇄살인범을 만든 사회에 책임이 있다"는 말이나 떠들고 있다면 어떻겠는가. 지금 여당이 그 꼴이다.

    "북한과 대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섣부르다. 이종석 통일부 장관의 말처럼 인질범과도 '대화로 문제를 푸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인질범과의 대화는 기동타격대를 범행 현장 주변에 배치한 뒤에나 가능하다. 대화론은 자칫 남한이 전쟁 발발을 두려워해 핵실험을 해도, 심지어 핵 위협을 해도 꼼짝 못한다는 그릇된 메시지를 북한에 줄 수 있다. 전쟁 중에도 대화 채널은 가동해야 하지만 지금은 우리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줄 때다.

    집권 세력에 묻고 싶다. "집토끼를 챙길 기회"라는 대선 표 계산 때문에 미국 책임론을 부각하고, 2002년 대선 때 '효순이.미선이' 효과를 노리는 것 아닌가. '무조건 북한 두둔=진보'라고 착각하는 것 아닌가.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막아야 한다"며 국민을 겁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