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6일자 오피니언면에 박두식 정당팀장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열린우리당은 정동영 전 의장을 빼 놓고선 생각하기 힘든 정당이다. 이 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 첫해에, 노 대통령이 내건 정치적 가치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그 과정을 직접 진두지휘한 야전 사령관이 정 전 의장이다. 창당 2년 6개월여 된 열린우리당의 역사에서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게 거의 없다. 가령 서울 영등포 중앙당사는, 농협 직판장으로 쓰였던 건물을 그가 직접 고른 것이다. 사무실 배치는 물론, 집기 하나하나에까지 그의 손때가 묻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당’이면서 동시에 ‘정동영 당’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열린우리당 의장직에서 사퇴했다. 지방선거 참패 책임을 지겠다며, 당의 1선에서 물러난 것이다. 그는 선거 막판, 자신의 거취 문제를 놓고 고민을 거듭했다고 한다. 당 의장에서 물러나는 게 상식이지만, 선뜻 그의 측근들조차 “그렇게 하라”고 말하기 힘들었다. 떠나기는 쉬워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국회의원도 아니고, 당직도 없다. 열린우리당의 평당원일 뿐이다. 여기에다 집권당 사상 최악의 선거 참패라는 낙인까지 찍혀 있다. 선거 직후인 지난 3일 실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통령 후보로서 그를 선호한다는 응답은 1.6%에 불과했다. 화려하기 짝이 없던 그의 정치 인생 10년이 허물어지는 듯한 느낌을 가질 만하다.

    정 전 의장 역시 이 같은 상황을 어느 정도는 예견했던 것 같다. 그와 참모들이 그토록 ‘컴백 시나리오’를 붙들고 고민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 답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정 전 의장은 ‘도박’을 택했다. 측근들조차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자”고 했다고 한다. 정 전 의장은 사퇴의 변에서 이 같은 자신의 심정을 밝히기 위해 백범 김구 선생이 윤봉길 의사한테 했다는 ‘현애살수장부아(懸崖撒手丈夫兒)’라는 구절을 인용했다. “낭떠러지에 매달렸을 때 손을 놓을 수 있는 것이 대장부”라는 의미다.

    정 전 의장이 승률 제로의 게임에 도전하는 것은 아니다. 이길 확률이 전혀 없다면 그건 도박이라 할 수 없다. 정 전 의장은 누가 뭐래도 현 여권의 대표적인 대선후보다. 노 대통령 취임 이후 3년 6개월 동안, 그는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이자 정권의 2인자였다. 상황 변화에 따라 언제든 다시 복귀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의 머리 속에는 추락의 속도가 빠른 만큼 반등하는 힘도 클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을 것이다.

    정 전 의장은, 3김(金) 이후 새롭게 등장한 정치세대를 대표해 온 인물이다. 그는 정치 입문 후 줄곧 ‘새로운 정치’를 외쳐왔다. 선배 정치인들을 사정없이 공격하고, 기성 문화에 거칠게 저항하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넓혀온 자칭 ‘정치 개혁 세대’의 맏형이다. 이들은 노무현 정권의 주축을 이뤘고, 지금도 그렇다. 정 전 의장측에선 최근 선거 참패 책임에서 노 대통령 몫이 훨씬 크다는 여론조사를 곧잘 인용하곤 한다. 억울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정 전 의장을 보는 세상의 시선은 그렇지 않다. 노무현 정부 실패의 책임을 함께 물을 수밖에 없는 인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정 전 의장은 최근 ‘메신저 거부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그의 화려한 말솜씨와 사자후에 가까운 연설에 오히려 등을 돌리는 사람이 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가 펼쳐온 정치가 한계에 부닥쳤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극적인 상황 변화나 반전’이 아니라 ‘정치적 재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