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19일자 오피니언면 '광화문에서'란에 이 신문 권순활 경제부차장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허위와 광기(狂氣)의 시대’였다. 한쪽에선 나치즘과 파시즘, 다른 쪽에선 볼셰비즘이라는 전체주의가 휘몰아쳤다. 1930년대부터 2차대전까지 유럽의 풍경은 우울했다. 

    상극인 것 같지만 닮은 점이 많았다. 개인의 자유에 코웃음치고 민족이나 계급 같은 집단에 집착했다. 경제에서는 시장(市場)보다 ‘계획’을 중시했다. 독선과 폭력에 바탕을 둔 유토피아적 사회공학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나치와 소비에트는 유무형의 폭력을 동원한 선전을 통해 세속적 천년왕국을 약속했다. 어디든 있게 마련인 출세지향 지식장사꾼과 함께 명망 높은 일부 지식인조차 권력의 손발 노릇을 서슴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파시즘이 설 자리는 없어졌지만 마르크시즘의 미망(迷妄)은 40년 이상 더 이어졌다.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철학자 카를 포퍼는 시대의 이단아였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두 사람은 전체주의나 집단주의적 세상읽기의 풍조에 영합하지 않고 죽는 날까지 맞섰다.

    이들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주목했다. 어떤 권력이라도 사회와 경제, 개인의 삶에 깊이 개입해 급진적 변화를 시도한다면 불행과 파멸을 불러온다고 경고했다. 내세운 청사진이 그럴싸할수록 그만큼 위험성도 커진다고 봤다.

    자유경제와 ‘열린사회’를 강조한 하이에크와 포퍼는 모두 90세를 넘는 장수(長壽)를 누렸다. 파시즘에 이어 공산주의의 몰락도 지켜봤다. 1944년에 펴낸 ‘노예로의 길’에서 “사회주의는 ‘억압과 노예의 평등’을 추구하므로 몰락할 수밖에 없다”고 예언한 하이에크는 소련 붕괴 소식을 듣고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라고 말했다.

    1970년대 후반 이후 미국과 영국의 ‘자유주의 혁명’은 두 사람의 지적 탐구에 힘입은 바 컸다. 사회주의의 생산성 낙후와 자유의 결핍에 절망한 동유럽 지식인들은 하이에크를 읽었다. “우리가 금수(禽獸)로 돌아가지 않고 인간으로 살아남고자 한다면 ‘열린사회’의 길만 있다”고 역설한 포퍼 역시 시간이 갈수록 빛을 발했다.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파시즘과 함께 공산주의를 ‘열린사회의 적’으로 지적한 포퍼를 좌파에선 극도로 기피했다. 마르크시즘은 물론 케인스와도 거리가 있는 하이에크에 대한 눈길도 그리 따뜻하진 않았다.

    이런 두 사람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하이에크의 ‘노예로의 길’과 ‘치명적 자만’은 자유주의자들의 필독서로 떠올랐다. 24년 만에 다시 번역 출간되는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도 벌써 관심을 끈다.

    1980년대 한국의 뒤늦은 좌파 붐은 억압적 군사정권의 공(?)이 컸다. 요즘 지식인사회에 부는 하이에크와 포퍼 재평가도 역설적으로 각 분야의 자유가 그만큼 위협받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인지 모른다. ‘잃어버린 5년’이 눈앞에 다가온 정권과 국민의 비극도 이와 맞물려 있다.

    하이에크와 포퍼의 논리에도 허점은 있다. 하지만 최소한 어설프게 세상과 인간을 바꾸려는 집단주의보다는 훨씬 효율적이고 정의롭다. 구체적 인간보다 추상적 관념을 중시하고, 희뿌연 미래에 매달려 현재의 희생을 강요하는 세계관은 얼마나 위험한가. 위선적 지식인들의 실상을 파헤친 영국 저널리스트 폴 존슨의 말처럼 ‘최악의 압제는 인정머리 없는 관념의 포학(暴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