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띠리리리리리!

    소설가 김한탕 씨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이것 봐, 김한탕! 소설 언제 줄꺼야!’

    ‘아이고, 좀 기다리라니까요.’

    ‘그 말이 벌써 몇 번째야. 약속 좀 지키고 살아라. 이 시간 개념없는 인간아!’

    출판사에 있는 선배 K의 전화다. 선배 K가 짜증을 내고 있는 이유는 김한탕 씨가 약속한 원고를 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작년 겨울까지 원고를 완성해 주기로 약속해 놓고는 봄도 다 끝나가는 지금까지 원고를 주지 못하고 있다.

    이런 씨발, 대가리가 돌아가야 소설이 나오든 말든 하지.

    김한탕 씨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야, 못 쓸 거면 계약금 도로 토해 놔!’

    ‘아, 거 형님. 왜 그러슈. 좀 같이 삽시다.’

    ‘야, 언제까지 원고 줄꺼야? 하루 이틀 기다리게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냐?’

    ‘알았어요. 내 다음주까지 드릴께.’

    ‘야, 너 다음 주까지 원고 안오면 선인세 다 토해놔!’

    ‘알았어요.’

    전화가 툭 끊겼다.

    이런 씨발.

    김한탕 씨는 짜증이 났다. 그나저나 소설은 시작 단계에서 빙빙 헤매고 있었다.

    제길, 되는 게 없네.

    ‘여보, 왜 그러게 집에서 빈둥빈둥 놀면서 일을 안해요!’

    이제는 마누라가 나서서 지랄이다.

    ‘어이구, 좀 조용히 해. 누구라고 안 쓰고 싶어 안 쓰냐. 생각이 나야 쓰지.’

    어휴, 이제 마누라도 싫증난다.

    김한탕 씨는 최근 마누라의 사랑이 식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김한탕 씨가 마누라를 더 이상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처음 아내를 봤을 때 김한탕 씨는 첫 눈에 반해 결혼했다. 마누라 이름이 좀 촌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모델로 뛰던 마누라 이미지가 너무 좋아서 뻑 갔던 것이다. 그리고 처음 봤을 때부터 어린 년 하고 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마누라와는 띠동갑이다. 그런데 마누라가 평범한 아줌마가 되어가는 지금 이제는 마누라 이름만 생각해도 짜증이 난다.

    제기랄, 여자 이름이 지맹길이 뭐냐.

    하기야 김한탕도 좋은 이름은 아니다만….

    김한탕 씨는 평소에 이름을 바꿀까 고민중이었다.

    이런 제기랄, 하여간 아버지는 좋은 이름 놔두고 왜 하필 내 이름을 김한탕이라고 지은 거냐. 쪽 팔리게.

    김한탕 씨는 아버지를 원망하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제 와서 그런 생각 해봐야 뭐하냐.

    김한탕 씨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여보오오오오오오오!’

    아이고, 왜 또 지랄이냐.

    ‘집 안에서 담배를 피우면 어떻해애애애애!’

    처음에 얌전하던 마누라가 이제는 반말에 짜증까지…. 정말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안 되지. 안돼.

    김한탕 씨는 주먹이 쥐어지던 것을 얼른 풀었다.

    몇 년 전에 마누라하고 아파트 주차장에서 대판 붙었다가 동네 사람들이 소설가 김한탕이 마누라 팬다고 헛소문을 내는 통에 크게 망신 당한 적이 있다.

    어이구, 내가 참아야지.

    김한탕 씨는 어슬렁어슬렁 담배를 들고 아파트 베란다로 나갔다.

    김한탕 씨는 아파트 베란다로 나가서 하늘을 쭉 휘둘러 보았다.

    엥?

    아파트 베란다에 조그만 빨간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요즘 아파트를 장식하는 새로운 조명인가?

    김한탕 씨가 주의깊게 눈 여겨 보니 아파트 베란다로 쫒겨 나와 담배 피는 남자들이었다.

    아이구, 그 팔자 더럽네.

    너희들 아침은 얻어먹고 사냐?

    김한탕 씨는 혀를 끌끌 찼다. 그런데 그들을 불쌍하게 생각할 처지가 아니었다. 베란다로 밀려나 담배 피는 처지는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나저나 뭘 쓴다지?

    풀리지 않는 소설, 지웠다 썼다 하는 것도 이제 지겨웠다.

    전화로 짜증을 내던 선배 K의 얼굴이 떠올랐다.

    완전 사기꾼 되는 구만, 구라의 남자야. 구라의 남자.

    그때 갑자기 바람이 휙 불어오면서 김한탕 씨의 얼굴을 때렸다. 담배 꽁초가 흩어져 날아갔다. 바로 그 순간, 김한탕 씨의 뇌리에 강한 자극이 왔다.

    구라의 남자!

    바로 그거야!

    갑자기 김한탕 씨는 베란다에서 만세를 불렀다.

    저 이가 미쳤나?

    김한탕 씨의 아내 지맹길 씨는 김한탕 씨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 보았다.

    김한탕 씨는 ‘구라의 남자’란 제목이 생각 나자 마자 바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가 막힌 제목이었다. 김한탕 씨의 전작 ‘벗기는 남자’에 이은 두 번째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될 것 같았다.

    ‘여보, 글쓰네요.’

    김한탕 씨의 아내 지맹길 씨가 말을 걸었다.

    ‘그래, 나 글써야 하니 말 시키지 마.’

    ‘그런데 오늘 그 날인데.’

    ‘뭐어어어어?’

    김한탕 씨는 짜증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날이라고.’

    ‘뭐어어어어?’

    ‘그 날이라니까아아아아.’

    ‘뭐어어어어어?’

    ‘됐어요.’

    마누라 지맹길 씨가 토라진 얼굴로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지맹길 씨가 안방으로 들어가 버린 뒤에야 김한탕 씨는 마누라가 무슨 의도로 그 날이 어떻고 했는지를 알아 차렸다.

    의무방어전!

    이런 제길, 오늘이 그 짓 하는 날이었잖아.

    김한탕 씨는 입맛을 쩍쩍 다셨다. 그런데 솔직히 별로 마누라하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솔직히 마누라하고 그 짓 하는 것도 눈에 콩깎지 씌었을 때 재미있었던 거지, 지금처럼 애 셋 낳고 볼 것 안 볼 것 다 본 상황이었으니 마누라에게 성욕이 생길 리 없다.

    하지만 그래도 김한탕 씨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 한 달에 한번 의무방어전 하는 날을 정해두고 마누라와 그 짓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살살 달래서 해야지.

    김한탕 씨는 마누라 생각은 접어두고 소설에 집중하기로 했다.

    ‘구라의 남자’

    제목을 착 쳐 놓으니 줄거리 생각이 막 솟아 올랐다.

    역시 난 천재야.

    김한탕 씨는 허둥지둥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김한탕 씨의 소설 기본내용은 대강 이렇다.

    [차기 서울시장을 노리는 여당 유력 국회의원 김 아무개 씨가 야당의 주요 대권후보들을 낙마시키기 위해 공작을 전개한다. 그래서 여당 의원 김 아무개씨는 온갖 구라를 동원해 가며 야당을 공격하는데 그러다 야당 측의 역공에 걸려 망신당하고 폭삭 망한다]

    역시, 이만하면 대박이야.

    김한탕 씨는 이렇게 생각하고 냅다 소설을 써갈기기 시작했다. 한편 김한탕 씨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소설 대박 나면 뭘 할까?

    옳지. 마누라하고 자식들한테는 소설 취재하러 떠난다고 구라치고 쭉쭉빵빵한 년 꼬셔 가지고 괌 같은 섬으로 여행이나 가야 되겠다. 낮에는 실컷 해변에서 계집애들 알몸 눈요기나 하고 밤에는 탱탱한 년이나 실컷 먹고.

    헤헤헤.

    김한탕 씨는 입에 하나 가득 침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여자애한테는 뭐라고 구라를 치지?

    마누라하고 이혼할 거라고 구라를 쳐야 겠다. 아니지. 요즘 계집애들은 책도 안 읽으니 내가 누군지 모를꺼야. 그냥 이혼남이라고 해야 되겠다.

    그때 김한탕 씨의 눈 앞에 풍만한 처녀의 가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쪽쪽 빨아야지.

    김한탕 씨는 자기도 모르게 처녀 가슴 쪽으로 얼굴을 디밀었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마누라가 나타났다.

    ‘야, 이 구라쟁이야아아아!!!’




    여보!

    헉!

    김한탕 씨는 잠에서 깨어났다.

    ‘왜, 남의 발을 잡고 빨고 그래요!’

    마누라 지맹길 씨의 발을 김한탕 씨가 쥐고 있었다. 김한탕 씨는 얼른 지맹길 씨의 발을 놓았다.

    이런 제길, 그럼 내가 꿈을 꾼 거냐?

    마누라는 매몰차게 등을 팩 돌려 계속 잤다. 김한탕 씨는 오늘이 토요일 오전이란 사실을 알았다.

    젠장, 나도 좀 더 잘까?

    띠리리리리리!

    김한탕 씨의 전화가 울렸다.

    젠장.

    ‘여보세요.’

    김한탕 씨는 얼른 전화를 받았다.

    ‘야, 원고 내놔. 이번 주까지는 줘야 할 것 아냐!’

    으이그.

    출판사의 선배 K였다.

    ‘야, 이 구라쟁이 새끼야. 이제 기다리는 것도 지겹다. 빨리 써서 갖고 와!’

    ‘알았어요. 알았다니까.’

    ‘야, 내가 네 소설 제목 정해줄께. 네 소설 제목은 구라의 남자야. 구라의 남자, 알았냐. 네 얘기 소설로 써서 갖고 와. 구라의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