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28일자 오피니언면에 한국헌법학회장을 역임한 이관희 경찰대 교수가 쓴 '시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우려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신문기사를 보면 기초지방의회 의원 후보자들이 정당 공천을 받기 위해 국회의원들에게 줄서기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백태를 보면 돈다발을 들고 오고 특산품 선물 공세에 연줄 동원해 부탁하고 의원들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별의별 행동을 다하는 등 그야말로 벌써 혼탁이 극에 달하고 있다. 

    올해 6월 30일 국회가 기초자치단체 의회 의원도 정당 공천을 받을 수 있게 법을 개정함으로써 그러한 부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광역자치단체까지는 정당에 의해 조직적 체계적으로 관리한다 하더라도 기초자치단체는 주민의 생활과 직결된 진정한 생활자치로서 중앙의 정치와는 무관하게 운영돼야 한다는 게 원래 열린우리당의 당론이었고 일반적 중론이었는데, 공청회를 거치지 않는 등 입법 절차상 중대한 하자를 범하며 여야 밀실 야합으로 명백한 위헌 입법을 한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21세기 국가 발전의 기본 전략이 지방자치단체의 특성화에 따른 세계화 전략이고 민선 지방자치 10년여를 지나면서 이제 조금 해볼 만한 기본 틀을 갖춰 가는 판에 기초자치단체까지 중앙정치판으로 만드는 개악을 한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당 공천을 통해 지방의회 의원을 완전히 장악하고 국회의원의 선거운동원화해 국회의원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최상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주장하는 기초의원의 자질 향상, 여성 진출을 위한 비례대표제 도입, 유급화에 따른 중선거구제 도입 등은 그야말로 지엽말단적인 구차한 구실에 불과하다.

    기초의원이 정당에 줄서기보다 생동감 있는 지역활동으로 지역특성을 살리고 친환경적 주민복지와 인권보장에 앞장섬으로써 풀뿌리 민주주의의 진수를 보여줘야 할 때에 지방자치가 왜곡되는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가까운 일본의 경우 중앙정치의 폐해 때문에 기초자치단체장이나 의원들 거의 100%가 무소속이다. 우리도 주민이 그렇게 선택하면 될 게 아니냐 하지만 지방자치 역사가 일천해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기초자치단체장까지 정당 공천을 배제하는 입법을 했어야 옳았다. 그야말로 제17대 국회의 개혁성 상실을 선언한 최대의 개악 입법이라는 비난을 받아도 조금도 지나침이 없다고 할 것이다.

    전국의 기초의원들이 분노해 7월부터 전국 각지에서, 10월엔 국회 앞에서 시위하고 헌법재판소에 위헌 여부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하면서 11월에는 의원직 총사퇴 결의까지 했지만 바로 정당에 줄서기가 시작돼 유야무야되고 있다. 국회의원의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총사퇴해 민주 발전을 위한 지방자치 전사가 되겠다는 기초의원들의 시민혁명적 수준의 결연한 의지가 필요한데 아쉬움이 남는다.

    정당 공천제를 전제로 내년 5월 지방선거를 예상해 보면 심란하다. 중앙정치와 관계없는 기초자치단체 선거도 중앙정치의 축소판이 될 것이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지방자치에는 관심이 없고 정국 주도권을 잡으려고 여야 중진들이 국회를 개점휴업 상태로 둔 채 난리법석을 떨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정당 간 사활을 건 대리전 양상으로 선거는 과열되고 고비용이 들 것이며 그것은 곧 부패의 고리가 될 것이다. 또한 기초의회가 구성된 뒤에는 지방자치는 없고 정당 간에 싸움만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기초의원에 정당 공천제를 도입한 것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지방자치를 더욱 중앙정치에 예속시키고 지방자치 발전을 크게 저해할 것이 분명하므로 재개정돼야 한다. 그리하여 기초자치단체 운영은 주민자치에 완전히 맡기고 국회의원은 그 지역의 국민대표로서 국가적 과제에 몰두하는 성숙된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