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는새로운 한미동맹 성공 70년의 출발
  • ▲ 1950년 8월 17일 미국 특파원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 ⓒ국가기록원 제공 / 연합뉴스
    ▲ 1950년 8월 17일 미국 특파원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 ⓒ국가기록원 제공 / 연합뉴스
    세계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한미동맹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표방한 한미동맹은 군사안보 동맹으로 출발했다. 이후 한미동맹은 경제, 외교, 문화 등 여러 분야를 포괄하는 동맹으로 발전하며 대한민국의 생존과 번영에 혁혁한 기여를 했다. 한미동맹의 탁월한 효용성은 지난 70년간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단적으로 입증된다. 한미동맹이 세계 역사상 가장 공고한 군사동맹이자 성공적인 동맹 중 하나로 평가 받는 것은 이런 명백한 성과들이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한미동맹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벌어진 전쟁 가운데 가장 많은 살상자를 낸 6·25전쟁의 산물이다. 한미동맹이 6.25전쟁의 산물이라고 해서 결코 거저 주어진 것은 아니다. 한미동맹은 1953년 정전협정을 앞두고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과의 치열한 외교전쟁을 통해 얻어낸 성과다. 한미동맹의 법적기반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 과정을 살펴보면 이승만 대통령이 얼마나 많은 고심과 노력을 했는지 잘 드러난다.

    치열한 외교투쟁으로 얻어낸 한미동맹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에 반대하며 북진통일을 강력히 주장했다. 정전은 새로운 분단이고, 동족 간에 더 많은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유엔군이 중공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마오쩌뚱(毛澤東)의 중화인민공화국을 붕괴시키지 않으면 한국 뿐 아니라 세계 자유진영 전체에 후환이 될 것도 우려했다.

    그러나 3차 세계대전으로의 확전을 우려한 트루먼(Truman, Harry Shippe) 대통령은 이 대통령과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의 만주 폭격 요청을 거절했고, 종전을 대선공약으로 내걸었던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종전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정전협정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북한은 미군 철수를 요구했다. 이 대통령은 미국이나 국제사회의 확실한 안보 보장이 이뤄지지 않으면 북한이 또다시 남침할 것을 우려해 미국에 상호방위조약체결을 요구했다.

    미국은 조약 체결에 처음부터 소극적이었다.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과 조약을 체결하면 자칫 원치 않는 상황에 끌려들어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미국의 소극적 태도에 실망한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 단독으로라도 북진을 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밝히며 거세게 미국을 압박했다. 그 백미(白眉)는 1953년 6월 18일 새벽에 결행된 ‘반공포로 석방’이었다.

    ‘반공포로 석방’은 고매한 인도적 조치

    아직도 일각에서는 반공포로 석방을 한 이승만 대통령을 비판하며 ‘전쟁광’으로까지 매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철저히 왜곡된 주장이다. 반공포로 석방은 공산주의를 싫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참전했던 포로 2만5천여 명에게 진정한 자유를 선사해준 지극히 인도적(人道的)인 조치였다. 인권변호사 출신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이 탈북어민을 강제 북송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고매(高邁)한 인도적 행위다.

    1953년 6월초 포로교환협상이 진행되고 있던 판문점에서 ‘협상 타결’ 발표가 나왔다. 한해 전 인도의 추진으로 유엔에서 통과된 ‘송환거부 포로에 대한 중립국 관리’가 이뤄지게 된 것이다. 타결된 협상의 주된 내용은, 인도의 장군을 대표로 한 중립국 감시위원단을 한국에 설치하고, 남한에 수용된 모든 포로들을 대상으로 유엔군과 공산군이 개별 면담을 실시하며, 남한에 남겠다는 의사를 가진 포로에게 북한에 있는 가족이 당할 일을 경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유엔의 잘못된 협상으로 북한에 가족이 있는 포로들이 송환을 거부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고 만 것이다.

    자유와 인권을 중시하는 철저한 반공주의자 이승만 대통령이 그냥 있을 리가 없었다. 이 대통령은 반공포로를 석방하기 12일 전인 1953년 6월 6일 원용덕 헌병사령관을 경무대로 불렀다. 그리고 “제너럴 원, 자네는 지금 공산 북한으로의 귀환을 반대하는 애국 청년들을 포로라고 생각하나? 그들은 모두 우리의 동포요, 애국하는 청년들이야, 그들을 구해야 해”라며 방법을 마련해 반드시 성공시킬 것을 지시했다.

    반공포로 석방, 한미동맹 체결의 ‘승부수’


    ‘포로교환협상 타결’ 발표가 나온 즉시 이승만 대통령은 브리그스(Briggs) 미국대사를 불러 정전협정을 위한 세 가지 전제 조건을 제시하며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전달할 것을 요구했다. 첫째, 미국은 한국에 대한 외부 공격을 공동방위 하는 조약을 대한민국과 속히 체결할 것. 둘째, 전쟁으로 파괴된 한국을 재건하기 위해 대규모 경제 원조를 제공할 것. 셋째, 미국 공군과 해군은 한국에 계속 잔류해야 하며, 남북통일을 위해 한국군을 지원해야 한다. 아울러 이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를 수락하지 않을 경우에는 남한 단독으로라도 끝까지 싸우겠다’는 입장도 함께 밝혔다.

    이승만 대통령의 거듭된 한미조약체결 요구를 번번이 거절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었으나 미국 내 반전 여론이 고조되자, 6월 6일자로 세 번째 조건을 뺀 수락 친서를 보냈다. 단독 북진을 막자는 계산이었다. 이 대통령은 실망했고 분노했다.

    다음날 이 대통령은 방송을 통해 북진통일을 선언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미국과 유엔이 침략 재발 방지를 보장하지 않은 채 휴전협정을 성립시킬 경우에는 공산군과 전쟁을 계속하도록 명령함과 동시에 전국에 특별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또한 육군총참모장 백선엽 대장을 비롯해 미국에 파견 훈련 중이었던 한국군 전원에게 귀국 명령을 내렸다.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미국과 전 세계를 향한 선언이었다.

    국민들도 거리에 나서 정전반대시위를 벌이며 이승만 대통령의 선택에 지지를 보냈다. 그리고 며칠 뒤 국가안보의 백년 비책을 마련하기 위한 이승만 대통령의 ‘승부수’가 던져졌다. ‘신의 한수’라고 평가받는 반공포로 석방이 이뤄진 것이다.

    반공포로 석방은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6월 18일은 포로송환합의서에 서명하기로 한 예정일이었다. 런던에서는 잠자던 처칠 수상이 침실을 뛰쳐나왔고, 도쿄에서는 아침 샤워를 하던 마크 클라크(Mark Wayne Clark) 유엔사령관이 면도기를 떨어뜨렸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 ‘에버레디’(ever-ready)의 시행을 검토했으나,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이승만 대통령을 대신할 인물이 없어 포기해야 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 후인 1954년 11월 18일부로 발효됐다. 미국은 한국에 7억 달러의 원조(4억2천만 달러의 군사원조와 2억 8천만 달러의 경제원조) 제공과 10개 예비사단 신설을 포함한 해군과 공군력의 증강을 약속했고, 한국은 한국군을 유엔군사령부의 작전지위권 하에 두기로 합의했다.

    한미동맹의 탄생한 과정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러나 한미동맹은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 후손들은 이 조약으로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한 예언처럼 위대한 유산으로 남았다. 이승만 대통령을 통해 하늘이 우리 민족에게 주신 커다란 선물이었다.

    진정한 애국자 이승만

    이승만 대통령은 3.15선거 과정에서 벌어진 부통령선거에 대한 부정으로 촉발된 4.19혁명의 모든 책임을 지고 자진 하야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역사와 후손들에게 외면당해 왔다. 때로는 남북 분단의 주역이 되고, 친일파 취급을 당하거나 미국의 앞잡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구한말 개화계몽운동을 시작으로 독립운동과 건국투쟁, 반공통일을 위한 노력과 국가발전 토대 구축에 평생을 헌신한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야박하다.

    이승만 대통령의 전쟁과 같은 외교독립운동으로 대한민국 독립이 명문화된 카이로 선언이 이뤄진 사실을 비롯한 그의 독립운동 행적은 제대로 다뤄지지도 않는다. 4.19혁명에 대해서도 차분하고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4.19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시위 중에 다쳐 입원해 있는 청년들을 위문하며,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라며,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고 격려했다. 하야 후 이화장에 거주할 때 장제스가 보낸 위로 서신을 받고서는 ‘이런 국민을 둔 나는 위로받을 필요가 없다. 불의에 궐기한 백만 학도가 있고 정신이 살아있는 국민이 있으니,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나라의 미래는 밝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하야 성명에서 알 수 있듯 대통령 하야도 민주주의의 소신에 따른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무부에서 ‘독립 미치광이’, ‘통일 미치광이’로 불렸을 만큼 애국자였다. 하와이 망명 생활을 포함하면 50년 동안 미국에서 살았지만 무국적자의 삶을 택했다. 유학과 독립운동을 하던 때는 조금 있으면 조국이 독립이 될 것이라는 신앙과 같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랬고, 망명생활을 할 때는 내 조국이 있는데 다른 나라의 국적을 취득할 이유가 없었기에 그랬다. 이런 그가 애국자가 아니라면 이 나라에 애국자라고 불릴 사람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뒤 이승만 대통령 기념사업이 활성화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 추진 움직임이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긴 하나 대한민국 정체성 확립과 미래를 생각하면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와 기념관 건립은 새로운 한미동맹 성공 70년으로 들어서는 첫걸음이 되어야 한다. 애국시민들의 참여와 성원이 절실하다.